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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신뢰받는 ‘의사’가 왜 없겠나

설경. 2008. 12. 25. 18:57

박 태 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ㆍ나서지 않으니 ‘돌팔이’만 설쳐
ㆍ올해의 사자성어 ‘護疾忌醫’

교수신문이 ‘호질기의(護疾忌醫)’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의 이 사자성어가 위기에서도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질책의 의미가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사자성어 ‘護疾忌醫’-

집권을 하면 여론의 흐름을 귀담아 듣지 않고 권력 내부에 성채를 쌓아올렸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독재시대의 권력은 물론이고 민주화 이후의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역시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국민들이 어렵게 쌓아 올렸던 민주주의가 하나 둘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런데 원래 ‘호질기의’를 사용한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이 사자성어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왜 의사에게 가기를 꺼리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 병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의사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수 있는 의사가 없으니, 자신의 병을 털어놓아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부는 일방적으로 독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야당이나 진보정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다. 정부·여당의 경제정책, 교육정책, 사회복지정책 등 너무나 많은 부분에 불만이 있지만, 야당은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점점 어려워지는 생활고에도 믿고 의지할 곳이 없다. 은행의 문턱은 마치 관치금융이 판을 치던 민주화 이전 시대만큼 점점 더 높아만 가고 있다. 신문에 버젓이 광고를 내는 불법 사채업자들의 희생양이 늘어가고 있지만, 누구 하나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서민의 고통을 안다고 하지만, 양극화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간다.

20세기 한국 사회는 고통스러웠지만, 희망과 신뢰가 있었다. 식민지 하에서도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3년 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한국 사회였다. 쓰레기통에서 무슨 꽃이 피겠느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것이 한국 사회였다.

경제적, 정치적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무기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었고, 나뿐만 아니라 남들도 그런 희망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다는 신뢰였다. 위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할 수 있겠지만,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희망이 없다. 한국 사회의 성장동력은 물질적인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나서지 않으니 ‘돌팔이’만 설쳐-

그러나 그 신뢰는 단순히 마음을 먹는다고 쌓아지는 것이 아니다. 희망을 가지라는 공익광고가 많이 나온다고 신뢰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진정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내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의사가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믿고 의지할 곳이 전혀 없겠는가. 문제는 신뢰할 수 있는 의사가 있어도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신뢰할 수 있는 의사들이 나서지 않으니, 이제 아무나 사람의 병을 고치려 한다. 병을 고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 의사인 양 환자를 보는 것도 문제지만, 병을 고쳐줘야 하는 명의가 손을 놓고 있는 것 역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호질기의’를 내멋대로 해석했다고 호통치지 마시라.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는가? 새해에는 나의 병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의사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처방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그런 의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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