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교육 문제를 설명할 때 쓰이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먼저 죄수의 딜레마다. 죄수는 나와 옆방의 동료가 같이 입을 다물면 벌을 면하지만 나는 자백하지 않았는데 동료가 자백하면 더 큰 벌을 받는 게임의 법칙 앞에서 동료를 믿지 못하고 벌을 덜 받는 쪽을 선택해 죄를 털어놓는 것을 말한다. 구성의 모순이라는 것도 있다. 극장에서 한 사람이 앞을 잘 보기 위해 일어서면 뒤의 사람 모두 일어서게 되는 현상, 그러니까 개인의 선택은 합리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불합리한 모순을 말한다. 붉은 여왕효과에 비유되기도 한다. 붉은 여왕의 세계에서는 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주변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은 제자리라는 이론이다. 나는 하고 싶지 않지만 남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너도 나도 하다보니 모두에게 굴레가 되는 것, 그게 한국의 사교육이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누군가 이 굴레를 벗겨주기를 바라는 구원의 기대심리가 있다. 역대 정권이 예외없이 사교육과의 전쟁을 부르짖는 배경이다. 예산 한 푼 없이 민심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가 내린 과외금지 조치는 지금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녀 사교육비 때문에 등골이 휜다는 서민들 가정에서 "전두환 정권이 그거 하나는 잘했는데" 하는 푸념이 더 많이 나온다.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한 지 넉 달 뒤 발표한 고교평준화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권 차원에선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지만 서민들은 사교육비 안 들여도 된다는 생각에 얼마간은 구원받은 느낌을 받았다.
고교평준화와 과외금지, 만약 이 두 정책이 살아있었다면 오늘날 사교육 문제가 이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외금지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이 내려져 죽은 자식이 됐고, 평준화는 정부가 나서 야금야금 허무는 바람에 껍데기만 남았다. 과학고·외국어고·국제고·자사고에 국제중까지 우수 학생만 들어간다는 특별한 학교가 정권 바뀔 때마다 늘어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 포화단계에 이르렀다. 대학의 서열구조, 사회의 학벌구조는 변함없이 공고한데, 교육제도는 평준화 이전 상황으로 돌아갔으니 사교육이 번창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른 공약은 줄줄이 파기하면서, 있는 규제도 풀어주라고 지시하면서, 없는 규제를 새로 만들어 공약을 지킨 게 선행학습금지법이다. 사람들이 설마설마 했지만 보란 듯 법제화한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이 법으로 정치적 이득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법이 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는커녕 더 답답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선행학습금지법은 이름과 실질이 다른 법이다. 법 이름만 보면 선행학습 자체가 금지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교육에서 하는 선행교육과 선행시험이 금지되는 것뿐이다. 사교육의 선행학습은 모두 허용된다. 그렇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법이 시행되면 일부 학교에선 교육당국의 단속망을 피해 음성적인 선행교육을 하려 하겠지만 일단 학생들에게 "선행학습 하고 싶으면 학원으로 가라"고 해야 한다. 현재 방과후수업을 통해 학교에서 흡수하고 있는 선행학습 수요도 사교육 시장에 내줘야 한다. 학교의 경쟁력은 더 떨어지고 학원의 흡수력은 더 강력해진다. 법의 이름을 공교육무력화법 또는 학원밀어주기법으로 해야 맞지 않을까.
법의 형평성도 문제다. 영재학교나 과학고는 적용 대상에서 이미 제외됐지만 일반학교와 중간지대에 있는 외고와 자사고, 국제중은 이 법 적용을 어떻게 받는지 애매한 상태다. 이들 학교마저 설립 취지를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예외를 인정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슬럼화하고 있는 일반고만 규제하는 꼴이 된다. 이래도 저래도 죄수의 딜레마, 구성의 오류는 풀 길이 없다. 평준화 체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이런 법을 시행하는 것은 결국 기만적이다.
박 대통령은 다른 지도자에 비해 교육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설프게 교육대통령 소리 듣겠다며 조자룡 헌 칼 쓰듯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수능등급제가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되고, 이명박 정부에서 만든 수능선택제가 박근혜 정부에서 폐기되지 않았던가. 사교육 시장은 제도가 바뀔수록 규모가 커지는 속성이 있는데, 박 대통령의 유일한 교육정책인 선행학습금지법이 이런 패착을 가져올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 이종탁 논설위원 >
전두환 신군부가 내린 과외금지 조치는 지금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녀 사교육비 때문에 등골이 휜다는 서민들 가정에서 "전두환 정권이 그거 하나는 잘했는데" 하는 푸념이 더 많이 나온다.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한 지 넉 달 뒤 발표한 고교평준화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권 차원에선 다분히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지만 서민들은 사교육비 안 들여도 된다는 생각에 얼마간은 구원받은 느낌을 받았다.
고교평준화와 과외금지, 만약 이 두 정책이 살아있었다면 오늘날 사교육 문제가 이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과외금지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이 내려져 죽은 자식이 됐고, 평준화는 정부가 나서 야금야금 허무는 바람에 껍데기만 남았다. 과학고·외국어고·국제고·자사고에 국제중까지 우수 학생만 들어간다는 특별한 학교가 정권 바뀔 때마다 늘어나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 포화단계에 이르렀다. 대학의 서열구조, 사회의 학벌구조는 변함없이 공고한데, 교육제도는 평준화 이전 상황으로 돌아갔으니 사교육이 번창하는 것은 당연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른 공약은 줄줄이 파기하면서, 있는 규제도 풀어주라고 지시하면서, 없는 규제를 새로 만들어 공약을 지킨 게 선행학습금지법이다. 사람들이 설마설마 했지만 보란 듯 법제화한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이 법으로 정치적 이득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법이 서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는커녕 더 답답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선행학습금지법은 이름과 실질이 다른 법이다. 법 이름만 보면 선행학습 자체가 금지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교육에서 하는 선행교육과 선행시험이 금지되는 것뿐이다. 사교육의 선행학습은 모두 허용된다. 그렇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법이 시행되면 일부 학교에선 교육당국의 단속망을 피해 음성적인 선행교육을 하려 하겠지만 일단 학생들에게 "선행학습 하고 싶으면 학원으로 가라"고 해야 한다. 현재 방과후수업을 통해 학교에서 흡수하고 있는 선행학습 수요도 사교육 시장에 내줘야 한다. 학교의 경쟁력은 더 떨어지고 학원의 흡수력은 더 강력해진다. 법의 이름을 공교육무력화법 또는 학원밀어주기법으로 해야 맞지 않을까.
법의 형평성도 문제다. 영재학교나 과학고는 적용 대상에서 이미 제외됐지만 일반학교와 중간지대에 있는 외고와 자사고, 국제중은 이 법 적용을 어떻게 받는지 애매한 상태다. 이들 학교마저 설립 취지를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예외를 인정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슬럼화하고 있는 일반고만 규제하는 꼴이 된다. 이래도 저래도 죄수의 딜레마, 구성의 오류는 풀 길이 없다. 평준화 체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이런 법을 시행하는 것은 결국 기만적이다.
박 대통령은 다른 지도자에 비해 교육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설프게 교육대통령 소리 듣겠다며 조자룡 헌 칼 쓰듯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수능등급제가 이명박 정부에서 폐기되고, 이명박 정부에서 만든 수능선택제가 박근혜 정부에서 폐기되지 않았던가. 사교육 시장은 제도가 바뀔수록 규모가 커지는 속성이 있는데, 박 대통령의 유일한 교육정책인 선행학습금지법이 이런 패착을 가져올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 이종탁 논설위원 >
'오피니언(사설,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교육 次官 14명 중 11명이 총장, 이러니 대학 개혁 되겠나 (0) | 2014.03.06 |
---|---|
[분수대] 다시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0) | 2014.03.04 |
[세상 읽기] 루저로 보일까봐.. / 김현정 (0) | 2014.02.26 |
[분수대] 앵커의 클로징 멘트 그리고 당신의 클로징 멘트 (0) | 2013.12.31 |
[노트북을 열며] 그만 좀 가릅시다 (0) | 2013.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