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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로스쿨 성공의 조건

설경. 2007. 9. 11. 00:34
[중앙일보 양영유] “야, 너희들은 귀도 눈도 없어?”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렸다. 1983년 3월 대학 도서관에서였다. ‘파쇼 타도’ ‘학원 자유 보장’이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른 선배들이 도서관 구석으로 달려갔다. 열람석에 누런 마분지를 압정으로 꽂아 파티션을 해놓고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속칭 ‘마분지족(族)’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운동권 학생이 말했다. “세상과 벽을 쌓고 법전만 외우는 너희들이 부끄럽다”고. 밖에서는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반파쇼 투쟁’ 구호가 더 거세졌다. 신입생이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올봄 같은 대학 도서관을 찾았을 때도 ‘마분지족’은 여전했다. 달라진 것은 관심 차이뿐. 한 남학생은 “학생들은 고시준비생에 관심이 없는데 학교 측은 엄청 신경을 쓴다”고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사회와 담을 쌓고 법학 지식만 달달 외운 ‘공부벌레’들을 법조인으로 뽑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는 것이었다. 사회가 다변화되고, 국제적인 법률 수요가 급증하는 시대에 획일적인 법조인 선발 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정부가 답답했다. 기초·첨단 학문 연구에 열정을 쏟아야 할 젊은이들이 고시에 매달리는 것은 국가적인 손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정부가 정권 말기에야 그 해법 찾기에 나섰다. 2009년 3월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을 열어 전문 법조인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로스쿨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따른 법률시장 개방에 대비하고, 국민에게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다. 다양한 학생을 뽑아 3년간 전문 교육을 시켜 세상 보는 안목을 갖춘 법조인을 길러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걱정부터 앞선다. 로스쿨이 절묘한 ‘실패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우선 ‘시점’이 문제다. 교육부는 다음달 중 총 정원을 정하고, 내년 3월까지 인가 대상 예비대학을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정치의 계절’에 어려운 과제다. 총 정원은 대선레이스가 한창일 때, 개별 대학은 새 정권 초기이자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 선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 정원은 ‘퍼즐게임’과 같다. 변호사협회 1000~1500명, 한국법학교수회 3200명, 국립대총장협의회 2500명 이상, 국회교육위원회 2000~2500명 등 요구가 제각각이다. 교육부와 법무부는 당초 10여 곳에 연간 사법시험 합격자(1000명)의 1.5배인 1500명 배정을 검토했었다. 퍼즐 맞추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대학 간, 지역 간 갈등은 어떤가. 전국 100개 법대 중 40곳이 죽기살기로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탈락하면 2류로 밀린다는 위기감에서다. 남의 대학 교수 빼오기와 묻지마 투자, 정치권 로비전도 치열하다. 서울 사립대 A총장은 “떨어지면 옷을 벗으라고 동문회가 압박해 잠도 안 온다”고 했다. 지방의 B총장은 “국립대 총장들이 ‘1도(道) 1로스쿨’ 관철에 몸을 던질 것”이라고 했다. 광역단체장과 지방의원, 국회의원들도 숟가락을 얹었다. 표밭이 걱정된 것이다. 이러다 로스쿨이 ‘정치스쿨’로 변질될까 걱정된다. 갈등을 봉합하려면 25~30곳에 3000명 이상을 배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을 닮아가는 꼴이다. 2004년 로스쿨을 도입한 일본은 당초 30곳만 인가할 계획이었지만 대학·자치단체·정치인의 로비에 밀려 74곳이나 인가해줬다. 결과는? 졸업 후 변호사 시험 낙방자가 절반을 넘는다.

로스쿨이 정치논리에 휘말린다면 그 결과는 뻔하다. 따라서 정치적·지역적 고려에 따른 나눠주기를 철저히 막아야 한다. 인가기준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정하고, 평가과정을 통째로 공개해야 한다. 그래도 정치권 압박이 있다면 공무원들은 옷 벗을 각오로 맞서야 한다. 그게 로스쿨 실패를 막는 길이다.

양영유 사회부문 차장 ▶양영유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yangy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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