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국의 심리학 교수팀이 별난 실험 결과 하나를 발표했다. 다름 아니라 세계 32개 도시인들의 보행속도였다. 약 18m를 가는데 평균 12.49초 걸렸다고 밝혔다. 실험이 이번에 처음은 아니어서 1994년의 13.76초보다 10% 가량 빨라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1초에 2보씩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행진 속도와 엇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특히 서울 사람들을 포함시켰으면 더욱 빨라지지 않았을까. '빨리빨리 증후군'이 있는 대표적인 도시라고 지적되어 왔으니 말이다.
왜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빨라진 것일까? 영국 연구팀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기술의 진전이 사람들의 이러한 조급증을 더 키웠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한국전쟁과 경제개발과정이라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조급증이 늘었듯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더욱 조급증을 키웠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버퍼링 증후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만 느리게 전송되면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증후군인 셈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쿼터리즘'이라는 딱지가 붙은 지도 오래다.
쿼터리즘이란, 사전적으로는, 인내심을 잃어버린 사고 ·행동양식을 이르는 말이다. 기원이 거창할 듯도 싶지만, 4분의 1을 뜻하는 영어 쿼터(Quarter)에서 나온 말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사람들은 15분 이상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몇 분 만에 채널은 돌아가고 만다. 웹(web)상에서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복잡하거나 생각을 요구하는 내용일라치면 시선은 금세 다른 페이지로 옮겨간다. 고상하게 '디지털 노마드'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용어의 남용인 경우가 많다.
사실 쿼터리즘은 젊은 세대를 향해 기성세대가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만든 말인지도 모른다.복잡한 것보다는 쉬운 것만 찾으려 하고, 한 분야에 대해 15분도 채 대화하지 못할 정도의 빈약한 지식을 가진 젊은 세대들이 늘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런 세대를 '쿼터족'이라고 딱지 붙이기도 한다.
어쨌든 긍정적으로 살린다면, 다양한 분야에 재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한 곳에 오랜 동안 정주해 있는 전통적인 지식인들과는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디지털 노마드 세대라고 찬양할 만도 하다.
어쨌든 속도를 중시하는 디지털 환경에 길들여질 수록 사람들의 문화 조급증도 심화된다. 디지털 시대의 문화 조급증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영화를 볼 때 조금만 몰입이 안 되어도 ‘빨리감기’ 버튼을 누른다. 액션영화의 경우 10분만에 다 본다는 이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에서는 가벼운 코미디, 오락영화들이 더 선호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메일은 문화 조급증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밀려나고 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메신저가 대세일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메일은 어느새 문서 수발용이 되었다.
또한 메일보다 휴대폰 메시지가 더 낫기 마련인데, 많은 이들이 휴대전화 메시지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응답이 없으면 말이다. 메신저나 문자 메시지가 몇 초 안 되는 시간인데도, 너무나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일부 광고기획사는 그러한 이들을 '플러그 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퀵백(Quick Back)’이라는 신조어 나타났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즉각적인 반응을 보고 싶어 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 조급증은 긴 작품에 대한 염증을 가속화 시킬 것으로 보인다. ‘긴 것’은 무조건 지루하고 참을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아무리 재밌는 동영상도 5분을 넘으면 안 된다. 쿨한 UCC라도 마찬가지다. 기승전결의 서사구조는 무너지고 짧고 강렬한 순간적 자극이 중요해진다. 논리성이 사라지고 만다. 어디 인터넷에서만일까? 인기 있는 영상이나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다.
디지털의 클릭 아이콘에 익숙해지다 보니 단편적인 지각 인상들을 짜깁기하는 몽타주 방식의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 때문에 서사와 진지한 의미성에 대한 이유는 없어지고 만다. 의사소통 시간과 사고가 지나치게 짧아진 것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짧은 분량에 담지 못하는 내용들은 거세 혹은 배제되는 것이 문화 조급증이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환경 속 작품의 생산 유통 소비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환경을 배제할 수는 없고, 디지털과 문자 텍스트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방안이 중요할 것이다.
파편화 되고 경박해진 원인을 모두 디지털에만 전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 이전부터 사람들은 사색과 통찰의 기회를 잃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길-러닝머신이나 타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이들이 만든 음악을 들으며 몸이나 관리하는데 치중한다.
어디 그런 탓만 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생산력과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시스템 안에 존재한다. 마치 그 위에 있으면 달려야만 설 수 있는 런닝머신처럼.
외부 필자의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이는 1초에 2보씩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행진 속도와 엇비슷하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 특히 서울 사람들을 포함시켰으면 더욱 빨라지지 않았을까. '빨리빨리 증후군'이 있는 대표적인 도시라고 지적되어 왔으니 말이다.
왜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빨라진 것일까? 영국 연구팀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기술의 진전이 사람들의 이러한 조급증을 더 키웠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한국전쟁과 경제개발과정이라는 사회적 환경에 따라 조급증이 늘었듯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더욱 조급증을 키웠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버퍼링 증후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만 느리게 전송되면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증후군인 셈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쿼터리즘'이라는 딱지가 붙은 지도 오래다.
쿼터리즘이란, 사전적으로는, 인내심을 잃어버린 사고 ·행동양식을 이르는 말이다. 기원이 거창할 듯도 싶지만, 4분의 1을 뜻하는 영어 쿼터(Quarter)에서 나온 말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사람들은 15분 이상 집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 몇 분 만에 채널은 돌아가고 만다. 웹(web)상에서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조금만 복잡하거나 생각을 요구하는 내용일라치면 시선은 금세 다른 페이지로 옮겨간다. 고상하게 '디지털 노마드'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용어의 남용인 경우가 많다.
사실 쿼터리즘은 젊은 세대를 향해 기성세대가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만든 말인지도 모른다.복잡한 것보다는 쉬운 것만 찾으려 하고, 한 분야에 대해 15분도 채 대화하지 못할 정도의 빈약한 지식을 가진 젊은 세대들이 늘고 있다면서 말이다. 이런 세대를 '쿼터족'이라고 딱지 붙이기도 한다.
어쨌든 긍정적으로 살린다면, 다양한 분야에 재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한 곳에 오랜 동안 정주해 있는 전통적인 지식인들과는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디지털 노마드 세대라고 찬양할 만도 하다.
어쨌든 속도를 중시하는 디지털 환경에 길들여질 수록 사람들의 문화 조급증도 심화된다. 디지털 시대의 문화 조급증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예컨대, 인터넷을 통해 영화를 볼 때 조금만 몰입이 안 되어도 ‘빨리감기’ 버튼을 누른다. 액션영화의 경우 10분만에 다 본다는 이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에서는 가벼운 코미디, 오락영화들이 더 선호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메일은 문화 조급증 때문에 오래 전부터 밀려나고 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메신저가 대세일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메일은 어느새 문서 수발용이 되었다.
또한 메일보다 휴대폰 메시지가 더 낫기 마련인데, 많은 이들이 휴대전화 메시지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응답이 없으면 말이다. 메신저나 문자 메시지가 몇 초 안 되는 시간인데도, 너무나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일부 광고기획사는 그러한 이들을 '플러그 세대'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퀵백(Quick Back)’이라는 신조어 나타났다.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즉각적인 반응을 보고 싶어 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 조급증은 긴 작품에 대한 염증을 가속화 시킬 것으로 보인다. ‘긴 것’은 무조건 지루하고 참을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아무리 재밌는 동영상도 5분을 넘으면 안 된다. 쿨한 UCC라도 마찬가지다. 기승전결의 서사구조는 무너지고 짧고 강렬한 순간적 자극이 중요해진다. 논리성이 사라지고 만다. 어디 인터넷에서만일까? 인기 있는 영상이나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다.
![](http://photo-media.hanmail.net/200709/09/dailyseop/20070909142901.361.0.jpg)
결국 짧은 분량에 담지 못하는 내용들은 거세 혹은 배제되는 것이 문화 조급증이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환경 속 작품의 생산 유통 소비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환경을 배제할 수는 없고, 디지털과 문자 텍스트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방안이 중요할 것이다.
파편화 되고 경박해진 원인을 모두 디지털에만 전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디지털 이전부터 사람들은 사색과 통찰의 기회를 잃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길-러닝머신이나 타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이들이 만든 음악을 들으며 몸이나 관리하는데 치중한다.
어디 그런 탓만 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생산력과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시스템 안에 존재한다. 마치 그 위에 있으면 달려야만 설 수 있는 런닝머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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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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