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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가 말했다. “명령에 따르기만 하면 공을 못세우더라도 무사할 것이고, 명을 거역하면 죄를 범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아뢰오니 조나라 공격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서 그는 신하에게 이겨 위엄을 과시하기보다 천하에 이겨 명성과 권위를 얻는 쪽을 택하라고 진언했다. 소왕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전국책’에 나오는 일화다.
지금의 대통령을 아득한 옛날 전국시대의 군주에 비할까. 그러나 지도자의 도리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신하에 지고 천하에 이긴다.’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대통령이 국민과 언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못마땅하더라도 중인(衆人)이 가리키는 쪽을 택하면 그게 바로 ‘신하에게 지고 천하에 이기는’ 묘리(妙理)이겠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처지가 오죽 난처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나 자신의 과오를 숨기기 위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매도하고 ‘법적 대응’ 협박을 서슴지 않은 점은 도저히 이해해 줄 수가 없다. 정부 고위 인사가 아니라 시정의 갑남을녀(甲男乙女)로서도 용인받기 어려운 무도 무치한 행태가 아닌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덩달아 언론을 비난 조롱하고 나선 점이다. 그는 지난달 31일 PD연합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서 언론을 비난하는 연설을 장시간 이어갔다. “언론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개혁을 하려 했는데 그렇게 되니까 옛날에는 편을 갈라 싸우던 언론 전체가 다 적이 돼 버렸다. 편들어주던 진보적 언론도 일색으로 저를 조진다.” 이어 아주 모멸적인 말로 언론을 매도했다. “그래서 깜도 안 되는 의혹이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정책실장을 대변한 것부터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통령까지 변 실장의 화풀이 담당 대변인을 자임하고 나선 격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진상을 전혀 알지 못한 상황에서 말이 먼저 나가버렸다. 언론을 비난하기에만 바빴지 진실을 규명하는 데는 게을렀던 셈이다.
“제가 매우 난감하고 할 말이 없게 됐다.” 노 대통령이 어제 오전 긴급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믿음을 무겁게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믿음이 무너졌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난감한 일일지 여러분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측근에 대해서만 믿음을 갖지 말고 저잣거리의 민성에도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런 창피는 당하지 않았어도 좋을텐데….
노 대통령은 메아리 앵무새 확성기 측근들을 믿지 않는 게 좋다. 그런 측근들을 기특해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번처럼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만다. 게다가 그 중 일부는 주인의 힘이 떨어져 보이기 무섭게 또 다른 주인을 찾아나설 게 뻔하다. 전 주인을 매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 하거나 새 주인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인들 없을까(이미 그렇게 활약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요?).
상식이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민의와 민성에 눈귀 기울이며 정치를 해야 한다. 언론은 사회와 시대의 반영·반향판이다. 취재원이 얼굴을 찡그리면 반영이 일그러질 것이고, 분노를 표출하면 반향이 거칠어질 것이다. 언론이 권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오해도 버릴 때가 되었다. 설령 권력이라도 그것은 반사적 권력일 뿐 그 자체는 아니다. 대통령의 임기로 말하자면 하루 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이다. 이제 여유를 가질 때가 되었다.
jing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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