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길, 만인보]수덕여관 창세기

설경. 2007. 9. 12. 00:36



어느 날 나혜석이 일엽스님을 찾아 수덕사로 왔습니다 일찍이 일엽에게 산문을 열어준 만공스님은 이번에는 웬일인지 문을 닫고, 하릴없이 수덕여관에 머물던 혜석은 어미젖이 그리워 찾아온 일엽의 아들에게 어미를 대신하여 젖무덤을 열어주고, 연하의 고암은 한동안 혜석과 소요하더니 혜석이 떠난 후 수덕여관을 사들이고, 또 어느 날 남편이 스물한 살 연하의 정부와 파리로 훌쩍 떠난 후 홀로 남겨진 고암의 처는 그리움으로 여관을 지키다 그마저 쓸쓸히 세상을 버렸습니다 모두들 떠나고 난 뒤 부질없는 바람만이 힘없이 여관 문을 열고, 닫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암 이응로 화백과 본처 박귀옥 여사 등 수덕여관에 얽히고설킨 사연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옛날 소슬하던 산문의 기억을 잊지 못해 잊힐 만하면 한번씩 수덕사를 찾곤 했다. 어쩌랴. 더덕구이 그윽하던 그때 그집은 번듯하게 나앉은 지 오래고, 주인 잃은 수덕여관은 기어이 절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실낱같던 기억마저 모두 사라져버리고, 갈수록 번잡해가는 사하촌의 풍경이란! 아, 나는 다시는, 다시는 덧없는 수덕사를 찾지 않으리라.

〈글·사진|유성문 여행작가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