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동서남북] 후보의 배우자를 주시하라

설경. 2007. 9. 21. 00:49


▲ 강인선 논설위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부인 김윤옥씨 블로그에 ‘남편을 위해 맨손으로 장어 잡던 날’이란 글이 올라왔다. 33년 전 간염에 걸린 남편을 위해 한탄강에서 야생장어를 잡아다 먹인 이야기다. 눈물겨운 내조를 주제로 조심조심 썼다.

대선후보의 배우자는 정치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 너무 눈에 띄지 않으면 무능해 보이고, 너무 자주 보이면 설친다고 욕먹는다. 그래서 대개 활동은 하되 비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식으로 수위를 조절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안전한 전략이다.

10년 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당시 ‘8룡(龍)’이니 ‘9룡’이니 하던 대선후보 부인들을 인터뷰한 일이 있다. 한 후보의 부인은 “선거를 치르려면 남편은 온미치광이, 부인은 반미치광이가 돼야 한다”고 했다. 유세 다니며 너무 웃었더니 선거 후에도 입가에 경련이 일며 아무 때나 웃음이 나오더라는 부인도 있었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다들 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국에서도 그랬다. 과거 후보 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저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이고 남편은 완벽한 대통령감이니 뽑아달라”고 했다. 지금은 달라졌다. 존 에드워즈(Edwards) 상원의원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공약과 정책을 남편보다 더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일급 참모다. 버락 오바마(Obama) 상원의원의 부인 미셸은 남편을 위해 무조건 변명하고 편들어주지 않는다.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런 태도가 판에 박힌 무조건적인 칭찬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후보 부인들이 이렇게 설치기로 결심한 배경엔 힐러리 클린턴(Clinton) 상원의원의 남편이 있다. 전직 대통령 남편이 유세장에서 “힐러리를 뽑으면 나도 덤으로 일 시킬 수 있다”고 선전하는데, 그 앞에서 현모양처 운운하며 얌전 뺄 때가 아닌 것이다.

유권자들은 후보의 배우자를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후보에게 바른 소리를 제대로 해줄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가까운 참모도 후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매번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통령에 당선됐을 경우엔 직언할 참모의 수가 더 적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자만이 유일하게 목이 날아갈 걱정 없이 옆에서 싫은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후보의 성품과 정서 관리 면에서도 배우자는 중요하다. 미국 대선후보들이 너도나도 닮겠다고 아우성인 레이건(Reagan) 대통령의 성공 뒤엔 부인 낸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거기서 나온 정서적 안정감이 레이건을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부인이 다 이해하고 알아주기 때문에 그에겐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말을 적게 하고 남의 말을 더 많이 듣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국민들까지 행복하게 전염시켰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와 자신감의 원천도 사실은 부인이었다.

제 아무리 유능해도 정서적으로 불안하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요즘 미국에선 배우자야말로 ‘진정한 러닝메이트’라며 전례 없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가족이 이렇게 리더십의 한 축을 짊어지기 때문에 정치는 ‘패밀리 비즈니스’이다. 그래서 정치인의 배우자도 사실은 정치인이다.

흠만 잡히지 않겠다는 소극적 전략이 무난하긴 할 것이다. 그러나 도전과 모험을 좋아하는 수퍼우먼과 에듀맘과 알파걸이 뛰는 시대에 그림자 내조는 너무나 안일한 전략이다. 배우자가 믿음직스러워서 후보를 지지하고 싶게 만들겠다는 정도의 배짱과 창의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강인선 논설위원 insun@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