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고교생을 위한 철학 카페] 진정한 '사람다움'에 대한 고민

설경. 2008. 3. 27. 08:07
사람은 올바름을 아는가.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서, 해도 좋을 행위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또는 꼭 해야만 하는 행위를 구분할 수 있을까. 워낙 복잡한 세상,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로 인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행위에 대한 기준이 당연하고 또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한 당연히 바보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어딘지 모를 찜찜함이 남는다.

↑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 했다. 사전적 정의로야 '부끄러이 여기는 마음'쯤으로 기술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부끄러이 여기는 마음은 다 큰 어른이 사거리 한복판에 서서 벌거벗은 채로 느끼는 정도의 애교스런 표현이 아니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통한이며, 그로 인해 주어질 하늘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의 뿌리다.

구약성서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숨었던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깨우치고 그로 인해 받게 될 엄청난 진노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은가. 결국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 그들이 얻은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진정한 깨우침이다. 따라서 수오(羞惡)의 마음은 의(義), 즉 올바름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안양 초등학생 살해 사건의 범인 정모씨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 만한 크기의 마스크를 쓴 채 시선도 알아채지 못하게 내려 뜬 눈으로, 간간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라고 한다. 그래야지. 그래야 당신도 사람, 그것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그래야 우리가, 이 사회가 당신에게 벌을 줄 수 있다. 스스로 한 짓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순순히 인정해야 당신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미어진다. 아무리 욕을 쏟아놓아도 답답함은 여전하다. 하고 싶은 말이 바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범인에게 직접 복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사실 나는 그 두 아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돈의 팔촌은 고사하고, 성씨조차 다르다. 같은 지역 주민도 아니며, 한 다리 건너서라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 내 주위엔 없다. 상황이 이렇다면, 내가 범인의 행위에 분개하고 저주를 퍼부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구태여 찾아본다면 그와 같은 유사한 추악함에 우리의 또 다른 아이들, 내 아이들이 노출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 정도(물론 이것도 매우 큰 죄악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내가 직접 판사인 양, 범인에게 극형을 내려야 한다는 판결을 선포하기에는 그 동기가 너무 미약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무한공간 속에서 그에게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고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했다. 누구라 한들 주검으로, 그것도 차마 입에 담기도 죄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을 듣고서 불쌍한 마음이 일지 않았을 것인가. 정말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는 존재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컴퓨터는 기록을 할지언정 쓰린 마음을 토로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범인의 앞길에 저주를 퍼붓는 것은 그러한 안타까움을 만들어낸 당사자이기 때문이리라. 너무도 당연하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사랑과 존중의 표현이다. 바꿔 말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쌍한 마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도덕률이 우리 안에 없었더라면 범인의 짐승 같은 행위에 국민 모두 눈이 뒤집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우리들 마음에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마땅함이 있기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 앞에서 처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지켜보고 있는 나 또한 부끄럽다. 막상 사건이 터지고 나니 범인의 잘못만 눈에 들어와 나 스스로를 반성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고, 또한 그런 따뜻한 마음이 그저 막연한 것으로 머물러 있었다는 자각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서로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쁘다는 것을 이유로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을 그 따뜻한 마음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실현되도록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제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그만하자. 나부터 그만하자.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2, 제3의 예슬이, 혜진이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다들 범인을 욕하는 에너지를 아끼고 아껴서 막연한 사랑의 감정, 존중의 감정을 손 내밀어 나누어 보고자 애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모두가 사람다움을 고민하고 존중하려 한다면 가능한 일이지 않겠는가.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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