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8세기 걸리버가 여행한 황당한 나라들
툭하면 정쟁, 권력만 탐하는 정치인
이기심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야후족
어디선가 본듯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익숙한 것을 으레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숟가락으로 얼굴을 들여다보면 얼굴이 홀쭉하다가도 볼록해진다. 새로운 접근은 정상으로 여겼던 본래 모습을 낯설게 만든다. 우리 사는 모습은 당연한 걸까? 이상한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야기는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 질문을 자극한다. 걸리버의 황당무계한 여행담은 근대인의 본성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리 모습을 반사한다.
18세기 영국인 레뮤엘 걸리버는 외과 의사다. 그는 세계를 누볐던 영국인답게 항해술에 관심이 많았고 의사답게 과학과 수학을 깊이 공부한 지식인이다. 그는 항해 도중 네 번씩이나 난파되어 이상한 세상을 보게 된다. 소인국 릴리퍼트, 대인국 브롭딩나그, 하늘을 나는 섬나라 라푸타, 고귀한 말들의 나라 휴이님이 그곳이다.
첫 번째 나라 릴리퍼트는 키가 15㎝ 정도밖에 안되는 초미니 인간들의 나라이다. 이 나라 정치권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왕 앞에서 누가 더 줄타기 묘기를 잘 부리는가에 따라 관직이 결정되고, 두 개의 정당이 구두의 뒷굽을 높이자는 쪽과 낮추자는 쪽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이념 투쟁을 벌인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상황도 우습다. 달걀을 위쪽으로 깰 것인가 아래쪽으로 깰 것인가가 싸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위대한 경전에 의하면 달걀의 편리한 끝부분을 깨어야 한다"고 증언하지만, 이런 사실은 정치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겐 국민의 복지와 행복보다 전쟁과 승리가 중요하다.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문제에 몰두해 큰 싸움을 벌이는 정치권의 모습이 익숙하다. 그들에게 실소를 날릴수록 릴리퍼트는 점점 우리 모습과 겹쳐지고 있다.
거인들이 살고 있는 브롭딩나그는 걸리버가 두 번째로 여행한 나라이면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치가 실현되고 있는 나라이다. 그곳의 왕은 비교적 이성적이고 지혜로웠는데, 영국의 역사와 제도를 전해들은 왕은 "대자연이 만든 가장 해로운 인종"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국왕, 귀족, 사제, 군인, 국회의원, 사법부 그 어느 하나도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브롭딩나그를 통해 바람직한 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강력하면서도 인간 본성을 해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통치, 그의 해법을 음미하는 것도 색다르지 않을까.
세 번째 나라인 라푸타는 지식과 학문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음악과 수학이 발달된 이곳에서는 악기로 장식한 옷을 입고 등변삼각형의 스테이크, 원곡선 모양의 푸딩 같은 음식을 먹는다. 수학과 음악을 모르면 인간 취급을 못 받을 정도인데 정작 재단사가 가져온 걸리버의 옷은 계산이 틀려서 몸에 맞지 않는 촌극이 벌어진다. 아카데미의 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배설물을 원래의 생물로 돌리는 연구,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추출해 내는 연구 등 하나같이 불가능한 연구에 몰두한다.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에 집착하는 지식인들의 허세와 비과학성을 꼬집는 대목이다. 근대 경험론과 과학혁명의 기풍을 호흡한 영국인다운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걸리버의 모험이 끝나는 곳은 말(馬)들의 나라이다. 이곳에서는 말 종족인 휴이님이 주인이고 인간 종족인 야후는 가축으로 사육된다. 휴이님은 질서 있고 이성적이고 우정과 박애를 중요시한다. 그곳엔 악도 부패도 없다. 반면 도둑질, 싸움, 욕정, 이기심으로 가득한 야후들은 들판의 도둑떼로 살아간다. 걸리버는 야후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한다. "이 징그러운 동물에서 인간과 꼭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공포와 경악은 도저히 필설로 옮길 수 없다." 휴이님과 야후의 비극적인 대조에서 걸리버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 머리카락을 가진 흉측한 괴물 메두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이 되었다 한다. 마찬가지로 걸리버도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본 순간 공포에 갇혀버렸다. 영국에 돌아온 후 인간 혐오자가 되어 가족도 거부하며 은둔해버렸으니 말이다.
이 책은 18세기 영국 사회에 대한 풍자이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과도 겹쳐진다. 시대의 보편성을 꿰뚫으면서 고전으로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날카롭고 충격적인 비판 뒤에 저자의 따뜻한 염려가 흐른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 스위프트가 근대 사회에 주문하는 목소리이다. 이 책에서 인간의 제도와 사상, 본성을 가로지르며 웃음이 철학으로 익어가는 새로운 경험을 권해 본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교사
18세기 걸리버가 여행한 황당한 나라들
툭하면 정쟁, 권력만 탐하는 정치인
이기심에 서로 으르렁거리는 야후족
어디선가 본듯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18세기 영국인 레뮤엘 걸리버는 외과 의사다. 그는 세계를 누볐던 영국인답게 항해술에 관심이 많았고 의사답게 과학과 수학을 깊이 공부한 지식인이다. 그는 항해 도중 네 번씩이나 난파되어 이상한 세상을 보게 된다. 소인국 릴리퍼트, 대인국 브롭딩나그, 하늘을 나는 섬나라 라푸타, 고귀한 말들의 나라 휴이님이 그곳이다.
첫 번째 나라 릴리퍼트는 키가 15㎝ 정도밖에 안되는 초미니 인간들의 나라이다. 이 나라 정치권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왕 앞에서 누가 더 줄타기 묘기를 잘 부리는가에 따라 관직이 결정되고, 두 개의 정당이 구두의 뒷굽을 높이자는 쪽과 낮추자는 쪽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이념 투쟁을 벌인다. 이웃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상황도 우습다. 달걀을 위쪽으로 깰 것인가 아래쪽으로 깰 것인가가 싸우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위대한 경전에 의하면 달걀의 편리한 끝부분을 깨어야 한다"고 증언하지만, 이런 사실은 정치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겐 국민의 복지와 행복보다 전쟁과 승리가 중요하다.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사소하고 비본질적인 문제에 몰두해 큰 싸움을 벌이는 정치권의 모습이 익숙하다. 그들에게 실소를 날릴수록 릴리퍼트는 점점 우리 모습과 겹쳐지고 있다.
거인들이 살고 있는 브롭딩나그는 걸리버가 두 번째로 여행한 나라이면서 그나마 제대로 된 정치가 실현되고 있는 나라이다. 그곳의 왕은 비교적 이성적이고 지혜로웠는데, 영국의 역사와 제도를 전해들은 왕은 "대자연이 만든 가장 해로운 인종"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국왕, 귀족, 사제, 군인, 국회의원, 사법부 그 어느 하나도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브롭딩나그를 통해 바람직한 정치를 제시하고 있다. 강력하면서도 인간 본성을 해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통치, 그의 해법을 음미하는 것도 색다르지 않을까.
세 번째 나라인 라푸타는 지식과 학문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 무엇보다 음악과 수학이 발달된 이곳에서는 악기로 장식한 옷을 입고 등변삼각형의 스테이크, 원곡선 모양의 푸딩 같은 음식을 먹는다. 수학과 음악을 모르면 인간 취급을 못 받을 정도인데 정작 재단사가 가져온 걸리버의 옷은 계산이 틀려서 몸에 맞지 않는 촌극이 벌어진다. 아카데미의 학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배설물을 원래의 생물로 돌리는 연구, 오이에서 태양광선을 추출해 내는 연구 등 하나같이 불가능한 연구에 몰두한다.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에 집착하는 지식인들의 허세와 비과학성을 꼬집는 대목이다. 근대 경험론과 과학혁명의 기풍을 호흡한 영국인다운 비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걸리버의 모험이 끝나는 곳은 말(馬)들의 나라이다. 이곳에서는 말 종족인 휴이님이 주인이고 인간 종족인 야후는 가축으로 사육된다. 휴이님은 질서 있고 이성적이고 우정과 박애를 중요시한다. 그곳엔 악도 부패도 없다. 반면 도둑질, 싸움, 욕정, 이기심으로 가득한 야후들은 들판의 도둑떼로 살아간다. 걸리버는 야후를 처음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한다. "이 징그러운 동물에서 인간과 꼭 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 내 공포와 경악은 도저히 필설로 옮길 수 없다." 휴이님과 야후의 비극적인 대조에서 걸리버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뱀 머리카락을 가진 흉측한 괴물 메두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돌이 되었다 한다. 마찬가지로 걸리버도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본 순간 공포에 갇혀버렸다. 영국에 돌아온 후 인간 혐오자가 되어 가족도 거부하며 은둔해버렸으니 말이다.
이 책은 18세기 영국 사회에 대한 풍자이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과도 겹쳐진다. 시대의 보편성을 꿰뚫으면서 고전으로 살아남은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날카롭고 충격적인 비판 뒤에 저자의 따뜻한 염려가 흐른다.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사회! 스위프트가 근대 사회에 주문하는 목소리이다. 이 책에서 인간의 제도와 사상, 본성을 가로지르며 웃음이 철학으로 익어가는 새로운 경험을 권해 본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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