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공사에 백성은 '울상' 신료들은 '침묵'
한양 도성의 체계가 거의 마무리돼 가던 세종 때, 경복궁 입지를 두고 또 한번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에 불을 붙인 이는 최양선이라는 풍수가였다. 그는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삼아 건설된 도성 형태가 잘못 됐다며, 경복궁보다는 종묘 쪽으로 치우쳐 있는 승문원 자리가 더 명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이양달, 정앙 등은 기존 경복궁 터가 더 명당이라고 했다. 이들은 도성의 정축(正軸)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백악을 주산으로 한 경복궁에서 보면, 멀리 관악산으로 그 축이 이어진다. 그런데 최양선의 주장대로 승문원 터에 궁궐을 지으면, 그 축이 가까이 남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수도의 정축은 단순히 풍수이론을 떠나 도시 기능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임금도 모르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황희 등으로 조사단을 꾸려 각 산맥의 흐름과 도성의 경관을 직접 조사케 했다. 그 결과, "형세가 너그럽고 평평해서 도시 기능에 적합한 경복궁이 명당"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후 승문원 명당설은 없던 일로 됐지만, 그 논쟁으로 인해 도성 한양에 대한 세밀한 지형조사가 이뤄진 것은 나름대로 거둔 성과였다.
한양의 도성과 궁궐 체계는 성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정립이 된다. 그러나 선조 때 이르러 두 차례 왜란이 휩쓸고 가면서 도시는 쑥밭이 되고 말았다. 경복궁, 창덕궁 등 주요 궁궐은 잿더미가 됐다. 1년 반 만에 피난지에서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선조는 새 궁궐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란 후유증에 덧붙여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새 궁궐 공사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됐다. 그나마 선조는 끝내 궁궐 재건을 보지 못하고, 행궁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은 광해군 또한 행궁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이 돼서야 새로 지은 인정전에 들었다.
하지만 흉흉한 민심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광해군 4년(1612) 9월. 유명한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임금에게 "도성의 왕기(王氣)가 이미 쇠하였으니 교하현으로 천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서얼 출신의 일개 지관이 올린 당돌한 상소에 광해군은 적잖이 관심을 보였다. 적통(嫡統)이 아니었던 광해군은 늘 자신의 권력기반이 부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터에 올라온 이의신의 상소는 광해군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광해군은 즉시 고위 관료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신료들 대부분은 반대를 했다. 그 중에서도 예조판서 이정귀(李廷龜)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풍수는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거 없는 술법으로 나라의 도성을 옮기자는 것은 괴이할 뿐입니다."
각사 각청의 신료들은 이의신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광해군은 전반적인 반대 분위기 속에서도 이듬해 1월에 교하 땅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의신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당연히 반대의견이 들끓었다. 교하천도론을 사이에 두고 임금과 신료들이 정면으로 논쟁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여전히 새 도읍과 궁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1616년. 풍수가 시문용, 성지 등이 "인왕산 아래 땅이 궁궐을 지을 만하다"며 광해군을 꼬드겼다. 광해군은 기뻐했다. 그 낌새를 눈치 챈 권신 이이첨도, 교하천도 논의를 멈추고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지으라고 귀띔을 했다. 광해군은 마침내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터를 잡고 인경궁을 짓게 했다. 또 이듬해에는 풍수가 김일룡의 건의에 따라, 왕기가 서려 있다는 새문동에 경덕궁을 건설하게 한다. 민가 수천 채를 헐어, 한꺼번에 여러 공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백성들은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간언하는 신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광해군의 노림수는 적중했다. 신료들은 이미 교하천도론에 대해 앞을 다투어 간쟁을 한 터라서, 인왕산 공사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신료들은 광해군의 양도논법(兩刀論法)에 휘말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
한양 도성의 체계가 거의 마무리돼 가던 세종 때, 경복궁 입지를 두고 또 한번 논쟁이 벌어진다. 논쟁에 불을 붙인 이는 최양선이라는 풍수가였다. 그는 백악(白岳)을 주산으로 삼아 건설된 도성 형태가 잘못 됐다며, 경복궁보다는 종묘 쪽으로 치우쳐 있는 승문원 자리가 더 명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이양달, 정앙 등은 기존 경복궁 터가 더 명당이라고 했다. 이들은 도성의 정축(正軸)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한양의 도성과 궁궐 체계는 성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정립이 된다. 그러나 선조 때 이르러 두 차례 왜란이 휩쓸고 가면서 도시는 쑥밭이 되고 말았다. 경복궁, 창덕궁 등 주요 궁궐은 잿더미가 됐다. 1년 반 만에 피난지에서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 행궁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선조는 새 궁궐을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란 후유증에 덧붙여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새 궁궐 공사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됐다. 그나마 선조는 끝내 궁궐 재건을 보지 못하고, 행궁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은 광해군 또한 행궁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이 돼서야 새로 지은 인정전에 들었다.
하지만 흉흉한 민심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광해군 4년(1612) 9월. 유명한 풍수가 이의신(李懿信)이 임금에게 "도성의 왕기(王氣)가 이미 쇠하였으니 교하현으로 천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서얼 출신의 일개 지관이 올린 당돌한 상소에 광해군은 적잖이 관심을 보였다. 적통(嫡統)이 아니었던 광해군은 늘 자신의 권력기반이 부실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터에 올라온 이의신의 상소는 광해군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광해군은 즉시 고위 관료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신료들 대부분은 반대를 했다. 그 중에서도 예조판서 이정귀(李廷龜)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풍수는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거 없는 술법으로 나라의 도성을 옮기자는 것은 괴이할 뿐입니다."
각사 각청의 신료들은 이의신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광해군은 전반적인 반대 분위기 속에서도 이듬해 1월에 교하 땅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의신에게 관직을 제수했다. 당연히 반대의견이 들끓었다. 교하천도론을 사이에 두고 임금과 신료들이 정면으로 논쟁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광해군은 여전히 새 도읍과 궁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1616년. 풍수가 시문용, 성지 등이 "인왕산 아래 땅이 궁궐을 지을 만하다"며 광해군을 꼬드겼다. 광해군은 기뻐했다. 그 낌새를 눈치 챈 권신 이이첨도, 교하천도 논의를 멈추고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지으라고 귀띔을 했다. 광해군은 마침내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터를 잡고 인경궁을 짓게 했다. 또 이듬해에는 풍수가 김일룡의 건의에 따라, 왕기가 서려 있다는 새문동에 경덕궁을 건설하게 한다. 민가 수천 채를 헐어, 한꺼번에 여러 공사를 일으키는 바람에 백성들은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간언하는 신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광해군의 노림수는 적중했다. 신료들은 이미 교하천도론에 대해 앞을 다투어 간쟁을 한 터라서, 인왕산 공사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신료들은 광해군의 양도논법(兩刀論法)에 휘말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박남일 자유기고가·'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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