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만훈.양영석] 서울 광화문을 비롯, 전국이 '쇠고기 정국'으로 한창 열기를 뿜고 있던 13일 오후 8시 서울 광진구 능동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선 또 다른 작은 소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7080을 겨냥해 만든 뮤지컬 '진짜진짜 좋아해'의 막이 오르고 '그 시절 그 노래'로 무장한 배우들의 몸짓과 음악이 이어지자 1200석을 꽉 채운 관객은 마치 타임캡슐이라도 탄 듯 젊은 날의 열광을 끄집어내 극장 안을 온통 환희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진짜진짜 좋아해'는 100억 달러의 수출을 목표로 하던 1970년대 말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그 시절 유행가요로 풀어낸 복고풍의 뮤지컬. 당시 국민 스포츠였던 고교야구를 소재로 투수와 여학생, 여학생의 언니인 영어교사와 야구부 감독 간의 사랑이란 빤한 스토리가 주축이다. 하지만 검정과 푸른색의 교복, 청바지에 통기타, 미니스커트가 등장하고, '진짜진짜 좋아해' '어쩌다 마주친 그대' '광화문 연가'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못찾겠다 꾀꼬리'등 당시의 인기가요가 24곡이나 동원(?)된 까닭에 그 시절의 정서를 오롯이 재현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 때문에 첫날 공연이 끝난 뒤 여기저기서 "공연시간 2시간30분이 짧게 느껴진다" "다시 보고 싶다"는 관람평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날 공연장을 빠져나오면서 유난히 들뜬 50대 사나이가 있었다. 공연 내내 무대와 객석을 꼼꼼히 살펴보던 그는 함께 구경한 지인들에게 V자를 들어 보이며 연신 파안대소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바로 80년대를 주름잡던 왕년의 스타가수이자 '진짜진짜 좋아해'에 동원되는 노래의 선곡과 편곡을 담당한 음악감독 구창모(54)씨였기 때문이다.
"박해미·박상면씨 등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 실력도 대단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저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진짜 진짜 기분이 좋습니다."
그는 91년 가요계를 떠나 옛 소련연방이던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건설업체 '아티스 글로벌'을 운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업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 2월 '진짜진짜 좋아해'의 음악감독을 맡아 석 달의 연습기간 동안 매달 대여섯 번씩 비행기로 날아와 음악을 지도할 정도로 열정을 쏟아부었다. 현지에 있을 때는 e-메일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맞췄다. 왜일까? '가수 구창모'에 대한 그리움?
그렇다면 사업가로 지내온 17년이란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가수에의 집념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나이가 들어도 어찌할 수없는 끼를 타고 난 데다 그것을 그 방식대로 풀어야 온전해지는 팔자 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여다보면 일종의 '한풀이'란 생각마저 든다. 본의 아니게 가요계를 떠나야했던 것에 대한….
홍익대 그룹 '블랙 테트라' 멤버였던 그는 78년 TBC 해변가요제에서 '구름과 나'로 우수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그는 80년부터 그룹 '송골매'의 리드보컬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등을 히트시켰고, 85년 솔로로 독립해서도 '희나리' '해야'등을 통해 대중적인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앳된 외모에다 3옥타브를 구사하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중·고생과 대학생은 물론 기성세대를 사로잡아 방송사 10대 가수상을 비롯한 각종 가요상을 휩쓸었다. 이같이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시련이 닥친 건 90년 1월 이른바 'PD 촌지사건'이 터지면서. 서울지검 민생특수부가 담당한 이 사건은 방송사의 쇼 프로그램 PD들이 가수들을 출연시키거나 노래를 틀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것으로 KBS·MBC 등 방송계와 가요계를 강타한 태풍이었다. '올스타쇼' '젊음의 행진' 등 관련 PD만 19명, 가수 100여 명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구씨도 조사를 받았다.
"당시 정상에 있던 가수로서 조사 과정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가수로서의 내 인생 자체가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체 국내에서 가수 활동을 중단했던 그가 가요계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한 것은 이듬해 12월. 이에 앞서 그해 7월 카자흐스탄 알마아타(현 알마티)에서 열린 음악축제인 아시아의 목소리(Voice of Asia)에 초청받아 갔던 것이 계기가 됐다. 신곡 '잎새처럼'과 민요 '한 오백년'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그는 마침 사업차 그곳에 들렀던 지인의 권유를 받고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업의 'ㅅ'자도 몰랐지만 가수 활동을 할 형편도 못 되는 터에 평소 호형호제하던 분이 하도 진지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에라! 하는 심정으로 덜커덩 마음을 굳혔습니다. 제가 원래 막무가내거든요. 당시 카자흐스탄의 사정이 우리나라 60년대 수준이라 웬만큼 버텨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한몫했지만요."
일단 맘을 먹고 나니 예상보다 일이 잘 풀려 나갔다. 우선 사업 아이템을 자동차 딜러로 잡은 것만 해도 그렇다. 아이템을 찾아 알마아타에 갔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팬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당시 현대종합상사의 자동차본부장(전무)을 만나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60분짜리 테이프에 '희나리'만 녹음해 갖고 다니며 들을 정도의 골수 팬이던 본부장은 대뜸 "전 세계에 현대차가 굴러다니지 않는 곳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밖에 없다"며 "적극 지원해줄 테니 한번 도전해 보라"고 권했고, 구씨가 이를 받아들여 당시 카자흐스탄에서 유일한 외제차 딜러가 된 것. 그가 첫 실적을 올린 건 세일즈를 시작한 지 9개월만인 92년 9월. 민간 은행장을 모스크바 출장길까지 따라가 저녁을 대접하며 '노래 공양' 끝에 단박에 34대를 팔아 치웠다.
"식사를 하며 '내가 한국에서 잘나가던 가수'라고 하자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예요. 그래서 노래방엘 데리고 가 그가 알 만한 노래로 '예스터데이' '마이웨이'를 잇따라 부른 뒤 앙코르를 하기에 '한 오백년'을 뽑았죠. 그랬더니 기립박수를 하며 그 자리에서 사인을 합디다. 돈도 일주일 뒤 현찰로 지불했고요."
첫 단추가 잘 꿰지자 탄력을 받은 데다 특히 94년 이들 신생공화국들에 화폐개혁이 이뤄지면서 인플레가 발생해 부자들이 자동차를 재화 보유 수단으로 삼는 바람에 95년까지 3년 만에 무려 줄잡아 40억원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좋은 끝엔 마(魔)가 끼는 법. 수중에 돈이 넘치자 당시 '더블 장사'란 녹용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그동안 차 팔아 모은 돈을 96년 초까지 6개월 만에 몽땅 털리고 말았다.
"차 판매로 돈이 뭉텅뭉텅 벌리자 저 스스로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토록 하고팠던 가수도 졸지에 된 데다 '송골매'로, 솔로로 모두 성공했죠. 그런데 사업까지 잘 되니…. 정말 기고만장했어요. 결국 하늘이 저를 가르치더라고요."
그는 다시 빈털터리가 됐지만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실제 그는 녹용 사업차 홍콩에 갔다가 열 살 아래의 부인을 얻었다). 그러자 곧 행운이 다시 찾아왔다. 바로 한국을 흔들었던 IMF 외환위기였다. 원화의 약화로 국내에선 몸살을 앓았지만 구씨는 오히려 양쪽에서 이익을 봤다. 98년 1월 한 바이어가 137만 달러를 현찰로 들고 와 졸라대는 등 하도 주문이 몰려들어 심지어 일주일 사이 100만 달러의 환차익을 보는 것은 일도 아닐 정도였다. 98~99년 이태 동안 무려 480억원어치의 매출을 올렸다. 녹용 사업으로 날린 것을 벌충하고도 훨씬 남을 만큼 벌었다. 하지만 이번엔 교만하지 않았다. 벌만큼 벌었다고 생각해 2000년 초 차 판매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 귀국해 때마침 부는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에 드라마와 연예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단순히 프로를 수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 방송의 편성권을 산 뒤 방영을 통해 광고로 돈을 버는 방식이었다. 새로운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중계약 시비가 일어 3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중앙아시아를 찾은 건 2005년 초. 차 판매 사업 때 거래하던 현지인한테서 "부동산 붐이 엄청나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단숨에 달려가 보니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은 넘쳐나는 오일머니로 땅값이 100배나 뛰는 등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한 시장조사 끝에 주택사정이 안 좋으면서도 아직 붐이 미약한 키르기스스탄을 사업 대상으로 택했다. 지인을 통해 국무장관과 건설부 장관, 총리를 소개받아 설득 끝에 수도 비슈케크에 1400세대 규모의 아파트 건설 사업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사업비만 모두 2500억원. 지난해 11월 모델하우스 오픈 때는 대통령 이하 대부분의 장관들이 참석해 "한국이 잘 하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잘 하는 줄 몰랐다"며 '아티스 타운'이란 명명과 함께 한국공법 시공아파트 시범단지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올 2월 우리은행과 컨소시엄으로 비슈케크시와 ^187ha의 신도시건설 ^쓰레기 처리 ^공공운송사업 등 총사업비 4500억원 규모의 3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SOC사업도 약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구씨는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가수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 때면 노래방에 가서 30~40곡씩 노래를 부르곤 한다. 사실 '아티스 타운'과 관련, 인허가 문제 등을 해결할 때도 건설부 장관한테 '딜라일라'를 선물한 것이 큰 몫을 했는데 이럴 때면 더욱 '가수 구창모'가 그리워 몸부림쳐야 했다.
"저는 아직도 본업이 가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1년 열심히 해서 사업을 안정시킨 뒤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더 늦기 전에 가수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 '진짜진짜 좋아해' 작업도 그런 일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가 꿈꾸는 건 '공연가수'이다. 이미 2004~2005년 7080콘서트 전국 투어에 참가해 가능성을 확인했다. 벌써부터 가수 몸만들기도 시작했다. 사업을 일으키는 투지로 보아 늦어도 후년쯤엔 '가수 구창모'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글=이만훈 전문기자 < mhleejoongang.co.kr > , 사진=양영석 기자
"박해미·박상면씨 등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 실력도 대단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저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진짜 진짜 기분이 좋습니다."
그는 91년 가요계를 떠나 옛 소련연방이던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건설업체 '아티스 글로벌'을 운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업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 2월 '진짜진짜 좋아해'의 음악감독을 맡아 석 달의 연습기간 동안 매달 대여섯 번씩 비행기로 날아와 음악을 지도할 정도로 열정을 쏟아부었다. 현지에 있을 때는 e-메일을 주고받으며 호흡을 맞췄다. 왜일까? '가수 구창모'에 대한 그리움?
그렇다면 사업가로 지내온 17년이란 세월에도 변하지 않은 가수에의 집념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나이가 들어도 어찌할 수없는 끼를 타고 난 데다 그것을 그 방식대로 풀어야 온전해지는 팔자 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 역정을 들여다보면 일종의 '한풀이'란 생각마저 든다. 본의 아니게 가요계를 떠나야했던 것에 대한….
홍익대 그룹 '블랙 테트라' 멤버였던 그는 78년 TBC 해변가요제에서 '구름과 나'로 우수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그는 80년부터 그룹 '송골매'의 리드보컬로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등을 히트시켰고, 85년 솔로로 독립해서도 '희나리' '해야'등을 통해 대중적인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앳된 외모에다 3옥타브를 구사하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중·고생과 대학생은 물론 기성세대를 사로잡아 방송사 10대 가수상을 비롯한 각종 가요상을 휩쓸었다. 이같이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시련이 닥친 건 90년 1월 이른바 'PD 촌지사건'이 터지면서. 서울지검 민생특수부가 담당한 이 사건은 방송사의 쇼 프로그램 PD들이 가수들을 출연시키거나 노래를 틀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것으로 KBS·MBC 등 방송계와 가요계를 강타한 태풍이었다. '올스타쇼' '젊음의 행진' 등 관련 PD만 19명, 가수 100여 명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구씨도 조사를 받았다.
"당시 정상에 있던 가수로서 조사 과정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가수로서의 내 인생 자체가 뿌리째 흔들렸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체 국내에서 가수 활동을 중단했던 그가 가요계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한 것은 이듬해 12월. 이에 앞서 그해 7월 카자흐스탄 알마아타(현 알마티)에서 열린 음악축제인 아시아의 목소리(Voice of Asia)에 초청받아 갔던 것이 계기가 됐다. 신곡 '잎새처럼'과 민요 '한 오백년'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그는 마침 사업차 그곳에 들렀던 지인의 권유를 받고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사업의 'ㅅ'자도 몰랐지만 가수 활동을 할 형편도 못 되는 터에 평소 호형호제하던 분이 하도 진지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에라! 하는 심정으로 덜커덩 마음을 굳혔습니다. 제가 원래 막무가내거든요. 당시 카자흐스탄의 사정이 우리나라 60년대 수준이라 웬만큼 버텨낼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한몫했지만요."
일단 맘을 먹고 나니 예상보다 일이 잘 풀려 나갔다. 우선 사업 아이템을 자동차 딜러로 잡은 것만 해도 그렇다. 아이템을 찾아 알마아타에 갔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팬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당시 현대종합상사의 자동차본부장(전무)을 만나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60분짜리 테이프에 '희나리'만 녹음해 갖고 다니며 들을 정도의 골수 팬이던 본부장은 대뜸 "전 세계에 현대차가 굴러다니지 않는 곳은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밖에 없다"며 "적극 지원해줄 테니 한번 도전해 보라"고 권했고, 구씨가 이를 받아들여 당시 카자흐스탄에서 유일한 외제차 딜러가 된 것. 그가 첫 실적을 올린 건 세일즈를 시작한 지 9개월만인 92년 9월. 민간 은행장을 모스크바 출장길까지 따라가 저녁을 대접하며 '노래 공양' 끝에 단박에 34대를 팔아 치웠다.
"식사를 하며 '내가 한국에서 잘나가던 가수'라고 하자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예요. 그래서 노래방엘 데리고 가 그가 알 만한 노래로 '예스터데이' '마이웨이'를 잇따라 부른 뒤 앙코르를 하기에 '한 오백년'을 뽑았죠. 그랬더니 기립박수를 하며 그 자리에서 사인을 합디다. 돈도 일주일 뒤 현찰로 지불했고요."
첫 단추가 잘 꿰지자 탄력을 받은 데다 특히 94년 이들 신생공화국들에 화폐개혁이 이뤄지면서 인플레가 발생해 부자들이 자동차를 재화 보유 수단으로 삼는 바람에 95년까지 3년 만에 무려 줄잡아 40억원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좋은 끝엔 마(魔)가 끼는 법. 수중에 돈이 넘치자 당시 '더블 장사'란 녹용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그동안 차 팔아 모은 돈을 96년 초까지 6개월 만에 몽땅 털리고 말았다.
"차 판매로 돈이 뭉텅뭉텅 벌리자 저 스스로 운이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토록 하고팠던 가수도 졸지에 된 데다 '송골매'로, 솔로로 모두 성공했죠. 그런데 사업까지 잘 되니…. 정말 기고만장했어요. 결국 하늘이 저를 가르치더라고요."
그는 다시 빈털터리가 됐지만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실제 그는 녹용 사업차 홍콩에 갔다가 열 살 아래의 부인을 얻었다). 그러자 곧 행운이 다시 찾아왔다. 바로 한국을 흔들었던 IMF 외환위기였다. 원화의 약화로 국내에선 몸살을 앓았지만 구씨는 오히려 양쪽에서 이익을 봤다. 98년 1월 한 바이어가 137만 달러를 현찰로 들고 와 졸라대는 등 하도 주문이 몰려들어 심지어 일주일 사이 100만 달러의 환차익을 보는 것은 일도 아닐 정도였다. 98~99년 이태 동안 무려 480억원어치의 매출을 올렸다. 녹용 사업으로 날린 것을 벌충하고도 훨씬 남을 만큼 벌었다. 하지만 이번엔 교만하지 않았다. 벌만큼 벌었다고 생각해 2000년 초 차 판매 사업을 접었다. 그리고 귀국해 때마침 부는 한류 바람을 타고 중국에 드라마와 연예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단순히 프로를 수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지 방송의 편성권을 산 뒤 방영을 통해 광고로 돈을 버는 방식이었다. 새로운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중계약 시비가 일어 3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가 다시 중앙아시아를 찾은 건 2005년 초. 차 판매 사업 때 거래하던 현지인한테서 "부동산 붐이 엄청나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단숨에 달려가 보니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은 넘쳐나는 오일머니로 땅값이 100배나 뛰는 등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철저한 시장조사 끝에 주택사정이 안 좋으면서도 아직 붐이 미약한 키르기스스탄을 사업 대상으로 택했다. 지인을 통해 국무장관과 건설부 장관, 총리를 소개받아 설득 끝에 수도 비슈케크에 1400세대 규모의 아파트 건설 사업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사업비만 모두 2500억원. 지난해 11월 모델하우스 오픈 때는 대통령 이하 대부분의 장관들이 참석해 "한국이 잘 하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잘 하는 줄 몰랐다"며 '아티스 타운'이란 명명과 함께 한국공법 시공아파트 시범단지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올 2월 우리은행과 컨소시엄으로 비슈케크시와 ^187ha의 신도시건설 ^쓰레기 처리 ^공공운송사업 등 총사업비 4500억원 규모의 3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SOC사업도 약정을 맺었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구씨는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가수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힘들 때면 노래방에 가서 30~40곡씩 노래를 부르곤 한다. 사실 '아티스 타운'과 관련, 인허가 문제 등을 해결할 때도 건설부 장관한테 '딜라일라'를 선물한 것이 큰 몫을 했는데 이럴 때면 더욱 '가수 구창모'가 그리워 몸부림쳐야 했다.
"저는 아직도 본업이 가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1년 열심히 해서 사업을 안정시킨 뒤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더 늦기 전에 가수로 돌아오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 '진짜진짜 좋아해' 작업도 그런 일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가 꿈꾸는 건 '공연가수'이다. 이미 2004~2005년 7080콘서트 전국 투어에 참가해 가능성을 확인했다. 벌써부터 가수 몸만들기도 시작했다. 사업을 일으키는 투지로 보아 늦어도 후년쯤엔 '가수 구창모'를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글=이만훈 전문기자 < mhleejoongang.co.kr > , 사진=양영석 기자
01.산 꼭대기 올라가
02.세상만사
03.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04.어쩌다 마주친 그대
05.그대는 나는
06.모두 다 사랑하리
07.처음 본 순간
08.빗물
09.아가에게
10.한줄기 빛
11.하늘나라 우리님
12.새가되어 날으리
13.모여라
14.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
15.사랑 그 아름답고 소중한 얘기들
16.희나리
17.문을 열어
18.슬픈 멜로디는 나를 울려
19.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20.방황
21.외로워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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