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대성그룹 김영대회장을 30년간 보좌해온 수석비서 전성희이사(65)

설경. 2008. 6. 26. 13:00
“명품비서 조건은 센스와 과묵함”

[중앙일보 전수진] 서울 인사동 대성그룹 본사에서 '미세스 심'을 모르면 간첩이다. 30년째 꼬박 오전 오전 6시30분에 출근하고 월요일마다 장미꽃 열 송이를 사오는 그는 김영대(66) 회장을 30년간 보좌해온 수석비서다. 이름은 전성희(65). 남편인 고 심재룡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성을 따서 '미세스 심'으로 불린다.

단순 업무로 치부되기 쉬운 비서를 전문직으로 각인시키는 데 일조, '비서계의 대모'로 통하는 인물이다. 국내 현직 비서 중 최장 근무이자 최고령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30년 비서 노하우를 모아 『성공하는 CEO 뒤엔 명품 비서가 있다』(홍익출판사)라는 책을 냈다.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후배들에게 나의 30년 경험이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냈다"라고 말했다. "세월이 얼만데, 이젠 회장님 눈빛만 봐도 '척'이죠"라며 웃는 낭랑한 목소리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제 목소리 하나도 회사의 이미지를 대표할 수 있으니 항상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려 애쓰죠. 전화만 받으신 분은 젊은 비서인 줄로 착각도 하세요"라며 싱긋 웃는다. 아이들 기르랴, 회사 업무 하랴, 머리 손질까지 매일 할 수 없어 일자로 자른 앞머리도 30년째 그대로다. 전체적으로는 단아한 정장 차림이지만, 분위기를 화사하게 하는 꽃무늬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의 책상 한쪽은 중국어·일어·프랑스어 사전 및 각종 외국어 참고서적으로 빼곡하다.

힘들었던 기억을 묻자 "회장님이 힘드셨을 때"라고 답하는 그는 천상 비서다.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그가 비서 일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전씨의 남편인 고 심재룡 교수와 김 회장은 대학 동창 사이로, 김 회장이 기혼자 비서를 찾자 심 교수가 부인을 추천한 것이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약국에 지원서를 내놓고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덜컥 비서 취업이 결정되는 바람에 이 길을 걷게 됐죠. 처음엔 1년 정도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즐겁더라고요. 어느새 30년을 하고 있네요."

그의 신조는 '하찮은 일이란 없다'다. "커피를 탈 때도, 온도와 비율 같은 걸 연구해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탈 수 있도록 했죠. 찾아오는 손님마다 설탕·프림 기호를 적어놓고 기억했다가, 또 오시면 취향대로 타드렸어요." 김 회장은 조찬 모임 등에서 커피를 마시고 온 뒤에도 '미세스 심 커피'를 반드시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김 회장과 30년간 아침마다 해온 각종 외국어 공부도 빼놓을 수 없는 하루 일과다.

비서의 자질로 그가 꼽는 것은 무엇보다 "상사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는 센스와 과묵함"이다. "비서의 어원은 '비밀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상사와의 신뢰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죠."

그렇다고 상사에게 무조건 '예스'만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회장님의 야당이 되기도 해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 드리는 용기도 필요해요. 예를 들어 평판이 너무 안 좋은 사람이 있으면 회장님께 살짝 여쭤봅니다. '회장님, 그 사람 어디가 좋으세요?'라고요. 그러면 회장님은 단박에 알아채세요."

회의실에서 고성이라도 들리면 짬을 보고 있다가 차를 들여가거나 재떨이를 바꿔주는 '센스'도 중요하다고. "회의 참석자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다 싶으면 '저, 회장님, 너구리 잡으려고 사냥꾼이 기다리고 있는데요'라고 말씀 드리기도 했죠. 분위기도 누그러뜨리고, 잠시 휴식하게 해드리는 거죠."

또 보고서 뒤에 인터넷에서 찾은 유머나 신조어를 살짝 끼워놓기도 한다. 김 회장이 잠시라도 쉬는 짬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김 회장도 그를 보통 비서 이상으로 대했고, 특수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1986년 독일 화학업체인 헨켈사가 합작 파트너를 찾자 전공인 약학을 살려 대성그룹 대표로 독일에 건너가 협상을 성공시켰던 것. 그렇게 태어난 것이 세제 전문업체인 대성C & S. 김 회장은 그런 그를 이 회사의 '창사 멤버'라고 부른다.

"회장님이 저를 필요로 하시면 계속 보좌할 생각입니다. 회장님 그만두실 때 함께 은퇴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제 나이도 나이지만, 회장님 이외의 분을 모실 수 있을 것 같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