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스크랩 / 정치ㆍ경제ㆍ교육등 사회 각 분야 갈등 고조◆
정치권 갈등, 노사 간 갈등, 교육부와 대학 간 갈등…. 최근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마디로 '갈등'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갈등은 상호 이익 추구점이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익 추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각자의 행복으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갈등에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행복을 중시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행복 추구가 사회적 안정ㆍ조화와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 행복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결국은 자기 만족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은 수용할 만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분명히 다릅니다. 따라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행복은 이성을 잘 발휘한 상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는 고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행복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목재는 식탁이나 침대가 될 목적을, 도토리는 동물의 먹이나 도토리묵이 되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재와 같은 각 존재의 원초적인 상태를 가능태(dynamis)라 부르고, 식탁과 같은 존재의 목적을 현실태 또는 완성태(energeia)라 불렀습니다. 완성태를 의미하는 희랍어 energeia은 '기능'을 뜻하는 ergon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태는, 다시 말해 모든 존재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은 그 존재가 지닌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제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한 상태는 무엇인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자신의 인간 규정에 따라 인간의 기능을 이성의 활용에 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말은 곧 행복이 인간이 이성을 가장 잘 활용할 때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용의 덕'을 제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윤리설이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② 행복은 감각적 쾌락이다 -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 윤리설
에피쿠로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와 달리 인간의 이성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들은 인간은 누구나 즐거운 삶을 원하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 목표는 쾌락이라 생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쾌락이란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모든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있어서 참다운 쾌락이란 허황된 욕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마음에 불안이 없고 몸에 고통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에서
③ 감각적 쾌락은 오히려 고통을 초래한다
고대 그리스 지역은 물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체가 없이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직체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데 좋은 여건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들도 감각적인 쾌락의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지나친 감각적 쾌락이 오히려 고통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지나친 감각적 쾌락의 추구가 더 큰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을 일명 '쾌락주의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 개인의 행복과사회적 행복의 조화 가능성
= 감각적인 쾌락은 본성상 주관적인 탓에 개인의 행복과 잘 어울리는 반면 보편성을 지니는 이성적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과 호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① 개인 행복의 총합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개인 행복이 극대화하면 자연스레 사회 전체의 이익이 높아진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벤담(Bentham, J.)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저인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대한 소고』에서 자연이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둔 탓에, 우리 행위는 자연스레 쾌락에 따르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각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인 행복을 극대화하는 행위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임과 동시에 유용한 행위가 됩니다. 법률학자였던 벤담은 개인의 행복이 유용성 원리에 따른다는 점을 토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곧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이러한 벤담의 가정은 너무도 소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밀(Mill, J. S)이 쾌락의 질적 차이를 구분한 것도 벤담의 소박한 가정이 초래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이었던 것입니다.
② 개인의 행복은 결국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익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각자는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능력을 보호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만족의 좀더 큰 순수 잔여량을 가져오기 위해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을 말없이 참을 이유는 없다.
합리적 인간이란 끈질기고 강렬한 이타적 충동이 없는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기본 권리와 이해 관계에 미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이득의 산술적인 총량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기본 구조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의 원칙은 상호 이익을 위해 모인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협동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 존 롤즈, 『정의론』에서
③ 진정한 행복은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때 실현된다
모든 사회는 다수의 개인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개인 이익과 사회 이익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이 개인과 사회 간 이익의 충돌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둘 중 한쪽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둘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들의 행위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행복을 사회에 대한 기여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일견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치의 접점을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모든 행위가 반드시 사회적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가 공동의 운명체라는 사실과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회 전체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서로가 각자의 이익 중 일부를 희생하는 것은 사회 도덕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덕'을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들이 느낀 것이 바로 이러한 중용의 덕을 실현할 때 얻을 수 있는 행복일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볼 문제
1.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맹목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초래한다는 쾌락주의 역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2.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는 예를 들고,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인 행위가 무엇인지 밝히시오.
[조관형 대성학원 수험논술 연구원]
◆ 행복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행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결국은 자기 만족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은 수용할 만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분명히 다릅니다. 따라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행복은 이성을 잘 발휘한 상태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는 고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행복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목재는 식탁이나 침대가 될 목적을, 도토리는 동물의 먹이나 도토리묵이 되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재와 같은 각 존재의 원초적인 상태를 가능태(dynamis)라 부르고, 식탁과 같은 존재의 목적을 현실태 또는 완성태(energeia)라 불렀습니다. 완성태를 의미하는 희랍어 energeia은 '기능'을 뜻하는 ergon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완성태는, 다시 말해 모든 존재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은 그 존재가 지닌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제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한 상태는 무엇인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자신의 인간 규정에 따라 인간의 기능을 이성의 활용에 뒀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이라는 말은 곧 행복이 인간이 이성을 가장 잘 활용할 때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중용의 덕'을 제시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윤리설이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강조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② 행복은 감각적 쾌락이다 -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 윤리설
에피쿠로스 학파는 스토아 학파와 달리 인간의 이성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을 더욱 중시하였다. 이들은 인간은 누구나 즐거운 삶을 원하기 때문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 목표는 쾌락이라 생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쾌락이란 인간의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모든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들은 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학파에 있어서 참다운 쾌락이란 허황된 욕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마음에 불안이 없고 몸에 고통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에서
③ 감각적 쾌락은 오히려 고통을 초래한다
고대 그리스 지역은 물을 관리하기 위한 조직체가 없이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직체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만드는 데 좋은 여건을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들도 감각적인 쾌락의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지나친 감각적 쾌락이 오히려 고통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삶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지나친 감각적 쾌락의 추구가 더 큰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을 일명 '쾌락주의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 감각적인 쾌락은 본성상 주관적인 탓에 개인의 행복과 잘 어울리는 반면 보편성을 지니는 이성적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과 호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① 개인 행복의 총합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
개인 행복이 극대화하면 자연스레 사회 전체의 이익이 높아진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벤담(Bentham, J.)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저인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 대한 소고』에서 자연이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군주의 지배 아래 둔 탓에, 우리 행위는 자연스레 쾌락에 따르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각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개인 행복을 극대화하는 행위는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임과 동시에 유용한 행위가 됩니다. 법률학자였던 벤담은 개인의 행복이 유용성 원리에 따른다는 점을 토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은 곧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이러한 벤담의 가정은 너무도 소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밀(Mill, J. S)이 쾌락의 질적 차이를 구분한 것도 벤담의 소박한 가정이 초래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이었던 것입니다.
② 개인의 행복은 결국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익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각자는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증진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능력을 보호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만족의 좀더 큰 순수 잔여량을 가져오기 위해 자신에게 돌아올 손실을 말없이 참을 이유는 없다.
합리적 인간이란 끈질기고 강렬한 이타적 충동이 없는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기본 권리와 이해 관계에 미칠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전체 이득의 산술적인 총량을 극대화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기본 구조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공리주의의 원칙은 상호 이익을 위해 모인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협동체라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 존 롤즈, 『정의론』에서
③ 진정한 행복은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을 함께 고려할 때 실현된다
모든 사회는 다수의 개인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개인 이익과 사회 이익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갈등이 개인과 사회 간 이익의 충돌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둘 중 한쪽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둘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들의 행위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단초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행복을 사회에 대한 기여에서 찾고 있기 때문에, 일견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치의 접점을 마련해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모든 행위가 반드시 사회적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가 공동의 운명체라는 사실과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회 전체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서로가 각자의 이익 중 일부를 희생하는 것은 사회 도덕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한 걸음씩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의 덕'을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사람들이 느낀 것이 바로 이러한 중용의 덕을 실현할 때 얻을 수 있는 행복일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볼 문제
1.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맹목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초래한다는 쾌락주의 역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2.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는 예를 들고,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도덕적인 행위가 무엇인지 밝히시오.
[조관형 대성학원 수험논술 연구원]
출처 : 별먹는 빛
글쓴이 : 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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