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스크랩] "[교과서에 숨어있는 논술주제]문학에서 철도역의 상징성"

설경. 2007. 9. 3. 00:15

[동아일보]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모스크바 역이죠. 소설 결말에 안나 카레니나가 철로에 몸을 던져 생을 마치는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이 작품은 철도역을 비극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하나의 전설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철도역은 그다지 반가운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철도역은 도시로, 전쟁터로 떠나는 공간이었습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진태(장동건 분)와 진수(원빈 분) 형제가 가족과 떨어져 의용대로 끌려가는 곳도 철도역이죠.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공간으로 떠나는 장소가 바로 철도역이었던 셈입니다. 당연히 남은 사람에겐 회한의 공간, 떨쳐내기 힘든 상처가 남아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철도역은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궁핍한 민중의 이별, 방황, 죽음의 상징물이 바로 철도역이었죠. 일부 자본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근대인들에게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철도는 화약이나 인쇄술만큼이나 우리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철도역에는 근대의 이 놀라운 기술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자세, 즉 새로운 기술을 단념하지는 않으면서 새로운 기술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사라지는 것을 통탄해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담겨있는 셈입니다. 곽재구 시인은 ‘사평역에서’를 통해 아름다우면서도 서럽고,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운명에 승리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멋지게 그려냈습니다.

전지용 최강학원 통합언어논술 대표강사

출처 : 별먹는 빛
글쓴이 : 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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