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행간에 숨겨진 중심 생각을 추론하라

설경. 2008. 9. 8. 17:40

[한겨레] 우리말 논술
유형별 논술 교과서 / 11. 조건비교형

■ 기출문제 유형 1-서울대 2008학년도 예시 [난이도 수준-중2~고1]

< 논제 > 제시문 (가)와 (나)에는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글쓴이가 고민하고 있는 상황을 비교하여 설명하시오.

(가)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세계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고(千古)를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황현, '절명시(絶命詩)', 고등학교 < 문학 >
(나)

나는 이모가 나를 흔들어 깨워서 눈을 떴다. 늦은 아침이었다. 이모는 전보 한 통을 내게 건네주었다. 엎드려 누운 채 나는 전보를 펴 보았다. '27일회의참석필요. 급상경바람 영.' '27'일은 모레였고 '영'은 아내였다. 나는 아프도록 쑤시는 이마를 베개에 대었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나는 내 호흡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내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思考)를 내게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이 선입관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의 전보는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흔히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그 자유 때문이라고 아내의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이 세월에 의하여 내 마음속에서 잊혀질 수 있다고 전보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바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 나서 다시 나는 그 편지를 읽어 봤다. 또 한 번 읽어 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 김승옥, '무진기행', 고등학교 < 문학 >
■ 해결 전략

제시문 (가)에서는 부정적인 사회 현실에 저항하는 한 지식인의 고독한 고뇌가 담겨 있다. 유학자로서의 현실참여는 당시 지식인이 가져야할 의무였으며, 존재 이유였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해온 이상을 실천할 기회마저 완전히 상실해 좌절 상태에 처하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한 극단적인 죽음은 절망과 체념이라는 개인적이고 도피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신념에 따른 행위라고 평가된다.

제시문 (나)에서는 개인의 욕망으로 인한 갈등과 고뇌가 나타나 있다. 일상의 굴레에 속박돼 있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현실을 벗어나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게 된다. 이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은 선택의 갈림길에 도달할 경우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현실적인 편안함의 유혹으로 이상을 접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존재적 삶을 추구하는 모험적인 선택도 있다.

결국 (가)와 (나)는 공통적으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가)는 유학자로서 개인적 이상과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사회적 책무가 동일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나)의 인물 '나'에게는 하인숙과 사랑을 꿈꾸는 개인적 이상과 아내에 대한 '결혼'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책무가 대립되는 상황이라는 차이가 있다.

■ 자료 검색

황현

유교적 지식인으로 조선 말기와 한말의 사회상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로써 항거했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아버지는 시묵(時默)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성이 있었으며, 특히 시와 문장에 능통해 17세 때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 응시해 문명을 떨쳤다. 1875년(고종 12)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정만조(鄭萬朝) 등과 교유하게 되었다. 특히 이건창·김택영과는 그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1883년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응시해 초시(初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그가 시골사람이라 하여 2등으로 내려놓자 회시(會試)·전시(殿試)를 보지 않고 귀향했다. 그 뒤 구례군 만수동(萬壽洞)으로 옮겨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88년에 성균관 회시에 응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관계 진출을 완전히 단념하고 1890년에 다시 귀향했다. 이후 만수산에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3000여 권의 서적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전념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사실상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보고, 중국 화이난 지방에 있던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 브리태니커 >

김승옥

< 무진기행 > < 서울 1964년 겨울 > 과 같은 빼어난 단편소설들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소설가 김승옥의 출발은 문학이 아닌 만화였다. 그것도 일간 신문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

김승옥은 서울대 불문과 1학년이던 1960년 9월 1일부터 신생 < 서울경제신문 > 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제목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방 출신 고학생의 학비 벌이의 일환이었지만, 이 장래의 소설가가 글 쓰는 재주 못지않게 그림 그리는 솜씨 또한 출중했다는 증거일 테다(그는 나중에 동인지 < 산문시대 > 에 문우들의 캐리커처를 그렸으며 여러 단행본 표지 그림과 장정을 맡았고 자신의 연재소설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단순히 그림 그리는 재주뿐만 아니라 세상사를 '삐딱하게' 관찰하고 그에 대해 논평하는 능력 역시 요구되는 게 시사만화의 세계다. 감각적 문체에 다소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측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승옥은 다름 아닌 4·19 세대 작가였다. 숱한 또래 문인들 중에서도 그는 4월 19일과 25일의 결정적인 시위에 모두 참여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시사만화가에게 요구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얘기다.(이하 생략)

- < 한겨레 > 2005. 11. 17일치
■ 관점 넓히기

토머스 모어가 쓴 < 유토피아 > (Utopia)는 이상향의 세계를 그렸다. 책 제목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다. 그리스말로 부정을 뜻하는 'ou'와 장소를 일컫는 'topos'가 합쳐진 말이 유토피아다. 테크노피아라는 말이 있다. 테크놀로지와 유토피아의 합성어다. 사실 이렇게 잘라 붙인 단어가 말이 되려면 '테크노토피아'가 맞다.

요즘 총선에 얽혀 정치(폴리틱스)와 교수(프로페서)를 합친 '폴리페서'와 정치와 언론인(저널리스트)을 합친 '폴리널리스트' 같은 기이한 말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어 어원을 따지면 도저히 조합도 안 되고 의미도 통하지 않는 엉뚱한 국산 말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편의적이고 조야한 두 단어의 조어 과정을 짐작해 보면, 단어가 지칭하는 무리들의 속성과 기막히게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도 많은 현직 교수들이 정치를 하겠다고 우르르 상아탑을 나섰다. 무작정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정치에 나아가 학문에서 배운 바를 실천하고,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기개를 품었을 수도 있다.

조선 정조 때 위백규는 수없이 관직을 고사하다가, 일흔 나이에 임금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관직을 받았다. 올라오자마자 쓴 글이 < 만언봉사 > 다. 그는 이 글에서 "1년 내내 책 한 권 변변히 읽지 않고, 무리를 지어 떠들 줄만 알고 관에서 주는 밥이나 축낸다"고 성균관 유생들부터 질타했다.

장준하 선생과 항일 독립투쟁을 벌인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총리 1순위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박정희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모두 열두 차례의 관직 제의를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90 나이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한번도 수락하지 않았다. 학자로서 살겠다는 삶의 신조를 지켰을 뿐이라고 했다. 김준엽의 지사적 지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백규의 양심적 기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학자다. 프로페서의 어원은 '고백'과 '양심'이다.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한겨레 > 2008년 4월14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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