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황석영의 장길산의 줄거리를 알려주세요.
장길산은 신분의 해체가 서서히 시작되던 조선조 효종 말, 도망하는 여비(女婢)의 몸에서 태어난다. 노상에서 길산을 낳자마자 그의 생모는 죽고, 구월산 광대들의 손에 기탁된 길산의 삶의 출발은 당시 유민계층이 천민세력의 핵심이 되어가는 시대의 박명과도 같은 상징이다. 광대로서 성장하는 길산은 같은 광대로 역사(力士)인 이갑송과 함께 해주 간상배 신복동 패를 혼내주고 송도 상인 박대근과 사귀게 된다.
한편, 흉년이 들어 색상에 팔려 창기(娼妓)가 되었던 묘옥(妙玉)은 재인말 총대 손돌 노인의 건짐을 받는데, 길산은 묘옥과 정분을 맺고 평생을 기약한다. 같은 도망 노비로서 봉산 자비령의 화적당 임태룡에게서 분가해 나온 마감동과 오만석이 구월산채의 두령노가를 등지고 장길산·박대근·이갑송과 손을 잡는다. 해주 상인 신복동은 선상 임유학을 모략에 의해 패망시키고 그의 충실한 도사공이었던 우대용은 살인죄로 투옥된다. 길산과 만나기로 했던 박대근은 신복동 패거리의 분풀이를 받게 되었고, 길산과 갑송이 그들을 징치한 후 달아나다가 길산이만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의 날을 기다린다. 때마침 길산은 해주 감영옥의 회자수 망나니로 전락하여 잔명을 붙이고 있는 우대용과 만나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출을 모의하기 시작한다.
길산이 탈옥에 성공하여 구월산에 당도해 보니, 묘옥은 간데 없고 그를 길러준 양부모는 누이동생처럼 자라온 봉순이와 혼인을 시키려 한다. 길산은 양부모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봉순을 아내로 맞고 갑송이 또한 성혼을 하는데, 이 기회를 빌어 뜻맞는 벗들이 형제의 의를 맺는다. 송상 박대근, 봉산의 선비 김기, 장길산, 이갑송, 해주 도사공 우대용, 구월산의 화적 마감동과 오만석, 그리고 장연의 소금장수 강선흥 등이었다. 길산은 마침내 생각하는 바가 있어, 풍열수님의 소개로 금강산에 은거하여 적국의 승려와 천민세력을 모으고 있는 운부대사를 찾아 떠난다. 한편, 안성의 사당패로 흘러간 묘옥은 모가비 고달근의 권유로 여주 도장(陶匠) 이경순을 알게 되고, 경순은 묘옥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묘옥은 송파 부근에서 자리를 잡고 주막을 차린다. 금강산에 들어간 길산은 운부의 지도를 받으며 산에다 화전 개간도 하고 역병에 시달리는 마을 사람들을 구호하여 새로운 뜻을 다진다. 길산은 차츰 백성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 하는 확실한 생각을 갖게 된다. 금강산에서 삼년 수도를 마친 길산은 생부의 종적을 찾아 묘향산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깨우쳐 운봉산에 들어가 다시 수도를 계속한다. 낭림산맥의 깊은 산중에서 그의 인간성과 정신은 더욱 성숙되고 깊어간다. 구월산으로 돌아온 길산은 선비 김기를 완전히 천민을 택한 사람이 되게끔 도와주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구월산 산채를 나누어 자비령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숙종 10년 봄부터 시작된 대기근이 전국을 덮치기 시작한다. 길 위에는 양식을 구하러 다니다 쓰러진 주검들이 하나씩 늘어났고, 역병까지 나돌게 되자 백성들의 울음은 곳곳마다에 가득 찬다. 이에 길산은 보다 너른 기민 구휼을 위해 자비령에다 그들의 세력 일부를 옮기려 한다. 관의 혹심한 수탈에 못 이겨 민변을 일으키고 도주해 온 자비령 산채의 두령 최흥복을 그의 수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그들은 구월산과 자비령을 중심으로 휘하의 모든 무리들에게 활빈에 나설 것을 명하고, 해서 곳곳에 출몰하여 관창과 부호를 털어 잡초처럼 버려진 기민들의 목숨을 건지기 시작한다.
이어 그들은 평안도에까지 그 세를 뻗쳐 나갔고 자연 장길산의 이름이 백설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급기야 감사 이세백은 출중한 무관들을 뽑아 토포에 나서나 실패하고 만다. 한편 한양 조정에서는 권세 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고 따라서 백성들의 원한과 탄성은 높아 간다. 이들의 짓눌린 삶에 응어리져 있던 울분이 불씨가 되어 한양 성내에서도 살육과 침탈의 불길이 번져 갔다. 부패한 관리와 무도한 양반들을 몰아내고 백성들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검계와 살주계는 부호와 대갓집들을 차례로 들이친다. 양반의 세상이 곧 끝난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한양 성내는 술렁대기 시작한다. 이에 포청에서는 당대에 그의 무예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포도 종사관 최형기를 토벌에 나서게 한다.
정묘년 4월, 입국(立國)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길산의 활빈도,운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巫系),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이 결속한다. 백성들 사이에서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하여 용화(龍華) 세계를 이룩한다는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한다. 이 때 고달근이 큰 이익을 꾀하다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이미 달아난 뒤이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징계하여 다스리고 최형기를 처단한다. 해서와 관북 일대에는 장길산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출몰해 조정을 괴롭히지만, 이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2. 등장인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 등장인물> * 장길산:쫓기는 노비의 몸에서 태어나 광대들의 손에서 길러지지만 총명하고 날렵하고 힘 있는 젊은이로 성장한다. 같은 마을 力士(이갑송)과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간상배(奸商輩)들을 혼내주며 송상(박대근)과 손을 잡고 통받는 민중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결심한다. 비운의 여인 묘옥과 평생을 함께 할 약조를 하지만 관가에 사로잡힌 그가 탈옥하는 사이에 헤어지고 만다. * 이갑송: 장길산과 같은 재인말 출신의 광대로 힘이 장사다. 간상배 신복동 패거리를 징치하며 괴력에 가까운 힘으로 길산을 도와 준다. * 박대근: 송도 상인 차인 행수로 상단을 거느리며 장길산과 손을 잡는다. 길산이 옥에 갇혔을 때 교묘히 탈출시키고 구월산 일당들과 광대패들을 돕는다. * 묘 옥: 흉년에 색상(色商)에 팔려 창기(娼妓)가 되었던 그녀는 재인말 총대 손돌노인에게 건져져서 그의 딸로 살게 된다. 뛰어난 미모의 그녀는 길산과 정분을 맺고 평생을 기약하며 가슴에 '길(吉)'자의 연비(聯臂)를 새긴다. * 마감동: 구월산 화적패의 모사꾼인 그는 길산의 도움을 받아 잔인한 두목 노가를 처치하고 두령의 자리에 오른다. * 우대용: 신복동의 모함에 걸려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투옥된 그는 박대근의 도움을 받아 죄인들의 목을 치는 회자수로 전락하는데 때마침 투옥된 길산과 더불어 탈출한다. * 강선흥: 장연의 소금장수 출신의 力士. 남장을 하고 길산을 찾아나선 묘옥을 구해준다. 갑송이와 힘겨루기 끝에 의형제를 맺는다. * 고달근: 안성사당패 모가비. 장사 강선흥과 한판을 겨루고 인연을 맺는데 묘옥을 그들 사당패에 머물게 한다. * 김 기: 버림받은 선비 출신의 학자. 갑송이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그는 구월산 녹림당과 한 패가 된다. * 풍열스님: 월정사의 괴짜 주지승. 문화 재인말 광대들을 탑고개에 정착시킨다. 장길산으로 하여금 금강산의 운부대사를 찾아가도록 권유한다.
3. 황석영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인 1962년에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하여 등단하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과 희곡 「환영(幻影)의 돛」이 각각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본격화했다. 1966~67년에 베트남전쟁 참전 이후 74년대 들어와 본격적인 창작 활동에 돌입하여 「객지」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 중단편들을 속속 발표하면서 진보적 민족문화운동의 추진자로서도 크게 활약했다.
1974년 첫 소설집 『객지』(창작과비평사)를 펴냈으며, 대화소설 『장길산』 연재를 시작하여 1984년 전10권으로 출간하였다. 1976~85년 해남, 광주로 이주하였고 민주문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소설집 『가객(歌客)』(1978), 희곡집 『장산곶매』(1980), 광주민중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 등을 간행했다.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 『황석영소설선집』 (1988)이 번역,간행되기도 했다.
1989년 동경,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 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 체류한다. 이 해 11월, 장편소설 『무기의 그늘』로 제4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90년 독일에서 장편소설 『흐르지 않는 강』을 집필,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다. 1991년 11월, 미국으로 이주, 롱 아일랜드 대학의 예술가 교환 프로그램으로 초청받아 뉴욕에 체류. 1993년 4월 귀국, 방북사건으로 7년형 받고 1998년 사면되었다
4. 장길산에 대한 해설을 알려주세요.
<해설 1>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서 '임꺽정'으로 시작한 대하소설의 맥은 '토지'를 지나 '장길산'으로 이어졌다. 1974년 한국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첫 선을 보인 '장길산'은 황석영 문학의 정점으로 현대문학의 값진 유산으로 남아있다.
'장길산'은 1976년부터 현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오기 시작해 30여 쇄를 찍었고, 1995년부터는 창작과비평사에서 각 권 별로 10쇄 이상을 찍었다. 또 풀빛출판사에서는 만화로 엮어 20권으로 내놓았다.
몇 년 전 '임꺽정'이 드라마로 방영된 데 이어 '장길산'도 SBS에서 남북합작으로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해 귀추가 주목된다.
이처럼 '장길산'이 꾸준히 읽히는 데에는 질펀한 입담으로 재미를 한껏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투철한 민중적 관점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의 장산곶이라는 어느 해안가 마을에 전해져 오는 전설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장길산'은 역사상 실재했던 사건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장석종 교수의 주목할 만한 논문을 통해 많은 사료들이 소개된 바 있다.
장길산의 활동상에 관해서는 '숙종실록'과 공초기록인 '추안급국안', '성호사설' 등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검계, 살주계 사건과 미륵신앙 사건은 '숙종실록, 야사인 '조야회통'과 '연려실기술'에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황석영은 이런 사료들을 바탕으로 철저히 민중적 시각에서 역사를 재해석하고자 한 의식적 노력에서 장길산을 탄생시킨 것이다.
황석영이 밝히는 장길산의 한국일보 연재에 대한 회고는 장길산 못지 않은 재미있는 얘기로 가득하다.
1974년 당시 황석영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의 젊은이였다. 이 해 3월에는 그의 첫 창작집인 '객지'를 출판한 직후였으며, '장길산'의 구상은 1972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장길산의 집필계획이 한국일보 문화부에도 알려져 연재 권유를 받게된다. 준비가 덜 된 상태라 고사하던 황석영씨는 충분한 시간과 지원을 하겠다는 한국일보 측의 설득으로 당시 사주였던 장기영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은 당시 집 한 채쯤 살 수 있는 액수의 재료비를 내놓았고, 복사기술이 형편없는 때라 사진기자를 불러 규장각에 있는 자료들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오게 하였다고 한다.
거금의 자료비를 받은 황석영씨는 만나는 사람마다 술 한 잔 사라고 난리였고, 그도 원없이 술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 패거리를 지어 한 보름쯤 줄창 퍼마시다 보니 자료비라는 돈을 다 써버렸다고 한다.
약속시간이 되어서 다시 한국일보 사주를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크게 웃으며 다시 자료비를 내놓았고, 명함을 꺼내 메모를 끄적이더니 이제부터 술을 마시려거든 그 집에 가서 자기 이름을 대고 마음대로 마시되 자료비는 꼭 자료수집에만 쓰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신문연재를 시작했어도 많은 양을 써댈 수가 없어 날마다 한 두 꼭지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당시 삽화를 맡은 이미 화단의 원로급인 운보 김기창 화백은 원고를 기다리느라 여행은커녕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파란만장한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부 고참기자는 원고 한 회분을 들고 운보에게 갔다가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표현하는 노화백의 꾸중을 들은 뒤에 먹물이 마르지 않은 삽화를 입으로 후후 불어대며 들고 뛰기도 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황석영씨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광주에서 해남에서 버스편으로, 텔렉스로 등등 갖은 수단으로 원고를 전송하는 등 많은 이들을 애태우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신문연재는 1974년 7월 11일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10년 동안 2,092회나 연재를 거듭한 끝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가파른 고비길이었던 1970년대와 80년대의 시대와 황석영은 그 운명을 같이한 작가이다.
이미 19세에 등단할 정도로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낸 황석영은 자신의 재주를 밀실에 가두지 않고 역사와 현실 속에 펼쳐 내었다.
1970년대 민족문학 리얼리즘문학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객지' '삼포가는 길' '한씨연대기' 등은 이른바 산업사회로 인한 인간 소외, 노동문제, 분단문제를 본격적으로 형상화한 소설로 당대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의 문학세계는 '임꺽정'의 뒤를 이어 해방 후 역사소설의 대미를 장식한 '장길산'을 지나 제3세계 문제를 다룬 소설로 '탑' '무기의 그늘'을 내놓았다.
황석영 씨는 1989년 방북 혐의로 1993년 시작된 5년간의 옥살이 끝에 지난해 가석방되었다.
<해설 2> 장길산, 그는 조선 왕조 숙종 때 이름을 떨친 의적이었다. 작가가 광대 출신인 의적을 주인공으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 직업적 특성이 당시의 사회상을 폭넓게 그려내려는 작가의 의도와 맞아떨어진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특히 하층민들의 삶의 애환을 구석구석 드러내는 데에는 넓은 지역을 떠돌며 연희를 베푸는 것으로 업을 삼는 광대의 시각만큼 편리한 것은 없었으리라.
<장길산>의 주인공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의 주된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여러 계층과 신분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이 삶을 영위했던 시대는 두 차례에 걸친 전란과 양반 계급 내부의 분쟁, 문란해진 정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하층민들에 대한 양반 관료들의 무자비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민중들의 생존 투쟁으로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전을 버리고 도주하는 노비들과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산에 들어가 '녹림당'을 이루는 무리들이 늘어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장길산>의 1부 역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파려간 남편을 찾아 만삭이 된 몸으로 도주하는 한 여비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이야기의 진행은 하층민들의 피해·보복·도주, 그들의 집단화와 의식화, 탐관오리와 악덕 부호들에 대한 징치와 굶주리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의 과정을 거치면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역모를 위한 공동 전선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사적 구조를 이루는 네 개의 부에 포함되지 않는 두 가지 전설이 이 소설의 첫머리와 끝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장산곶 매'라는 황해도 지방의 전설과 전라도 능주땅에 전해 오는 '천불동 전설'이다. 이 방대한 규모의 대하소설이 전설로써 수미를 장식하고 있는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 보인다.
전설에는 장구한 세월 동안 민중들의 의식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염원이 깃들여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삶의 정서들이 언어적 질서를 부여받음으로써 전설이라는 보편적인 실체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이 소설 앞머리의 '장산곶 매' 전설을 한 마리의 매로 상징되는 민중 장수의 비극적 운명을 통해 작품 전체에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끝부분에 놓인 '천길동 전설'은 이 소설에 펼쳐진 다채로운 사건들의 의미를 미륵사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면서 대미를 장식하는 기능을 해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표지로서 발목에 묶어준 끈 때문에 장산곶 매는 구렁이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전설에서 우리는 억눌린 자들에 대한 연대 의식 때문에 목숨을 불사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운명을 강하게 감지하면서 이 소설을 읽어 나가게 된다. 이 장엄한 비극성은 시대적 운명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북성이나 산지니와 같은 천민들의 행동에 되풀이되는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은 용천 세계, 즉 미륵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게 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투쟁하고 죽어 가는 것이다. 이들의 저항은 일차적으로 현세에서의 해방을 지향한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마주친 좌절 속에서 미륵 세상은 언젠가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하기도 한다.
보잘것없는 천민인 산지니가 자기 처지의 억울함을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위한 투쟁의 결과로 마주치게 된 죽음의 장면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산지니는 한낮의 네거리에서 공개 처형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의 뇌리에 하나의 깨달음이 번개처럼 스쳐간다. "미륵은 언제가 오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넋 가운데 시시때때로 찾아들어 이렇게 잠깐 당신을 현신시키고는 넘어진 내 고깃덩이를 넘어 다른 넋으로 찾아간다. 미륵은 내게 왔다. 미륵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다."
황석영은 1부에서는 풍열 스님, 2부에서는 운부 대사의 입을 통하여 세상 개조를 위한 사상으로서의 미륵 사상을 보여 주었고, 3부에서는 산지니의 죽음을 통해 그것의 체현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4부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시 회에 폭넓게 자리잡은 미륵 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억눌린 자들과 처지에 공감하는 지식인들까지 포함한 공동 전선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들 내부에 존재하는 방법상의 편차와 산재하는 세력들 사이의 쟁 시차 때문에 봉기는 무산되고 만다. 사상적 편차의 핵심은 '진인'을 내세워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려는 생각과 층부만 다른 양반으로 바뀌게 되는 한 민중들의 질곡은 해결될 수 없다는 근본주의적인 생각 사이에 존재하다. 작가의 시각은 후자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상의 서술은 이 소설의 전체적 구조와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미륵 사상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본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생명감은 주로 당시 민중의 심층 의식 또는 집단무의식에 대한 풍요로운 재현에서 비롯된다.
사실적인 묘사의 사이사이에 설화, 민담, 잡가, 민요, 무당의 사설, 그리고 옛사람들의 생활 기록 등을 통해 그 새대 사람들의 정서와 사고 방식, 그리고 시대적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비들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들의 모습을 닮은 천불과 천탑을 세움으로써 그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이루려 했다는 '천불동 전설'은 이 소설을 미학적으로 마무리하는 데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이 전설에 담긴 핵심적이 뜻은 운주사라는 절 이름에 대한 늙은 노비의 해설로 집약되고 있다. 미륵님 세상은 배. 그것을 뜨게 하는 물은 그들과 같은 천민을 포함한 만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꿈의 실현은 결국 기약학 수 없는 미래의 시점으로 옮겨지고 있지만, 작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마지막 문장 속에 강렬한 희망을 심어 놓고 있다.
"티끌처럼 수많은 생령들의 뜻이 어찌 이루어지지 않으랴." |
출처: 다음 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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