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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칼럼]청첩장 받고 얼굴 찌푸려서야

설경. 2008. 11. 7. 18:06

[내일신문]

봄 가을이면 청첩장이 ‘노도처럼’ 밀려와서 무척 부담스럽다는 지인이 있다. 딱히 그 분뿐 아니라 이맘 무렵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결혼식장에 얼굴 내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시쳇말로 청첩장은 고지서와 마찬가지라고까지 하지만 반가운 마음보다 부담감이 먼저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축의금 때문일 것이다.

그 분은 ‘동창회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은 자식들의 청첩장을 갖고 온 사람’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그럴 바에는 누구에게 언제 얼마를 받았고, 이 쪽에서는 얼마를 부조했는지 일일이 치부책에 적어두고 적절한 때에 서로 주고받는 것이 오히려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퇴직하고 나면 바람 빠진 풍선 취급 받을세라, 현역에 있을 때 자녀들을 혼인시키려고 서두르는 것도 축의금을 거둬들이는 것과 관련있는 일이니 어쨌거나 우리의 결혼식은 당사자보다 혼주 중심으로 치러지는 ‘집안 잔치’임에 틀림없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요즘, 호주도 바야흐로 선남선녀들의 결혼 시즌을 맞고 있다. 주변에서 누구네 아들 딸이 결혼한다는 소리가 전에없이 자주 들리지만 한국에서처럼 부담감에 짓눌려 반갑지 않은 기색부터 하는 일은 없는 듯하다.

호주의 결혼 문화는 우리와는 사뭇 달라서 철저히 당사자인 신랑-신부 중심으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의 전과정을 당사자들이 주관하며 하객들도 신랑-신부의 친구 위주로 구성되고 어른들은 양가 부모와 조부모 등 선별(?)된 가까운 친척 몇 명만 초대를 받는다.

본인들이 부르고 싶은 사람을 다 부른 후에 남아있는 몇 자리를 부모에게 선심쓰듯 내어드리는 상황이라 부모들은 친지들을 위한 자리를 하나라도 더 빼내느라 자녀들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여야 할 지경이다.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받아낸 청첩장이니만큼 대부분은 직계가족에게 돌아갈 뿐이어서, 사돈의 팔촌도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우리의 결혼식 문화에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다.

멋모르고 혹여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축하해 줄 요량으로 불쑥 결혼식에 모습을 나타냈다가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호주의 결혼식은 예식 자체는 조촐하게 끝난 후 정작 분위기는 피로연에서 무르익는 탓이다.

연회에는 청첩장을 받은 사람마다 지정석이 마련되고 예식을 포함하여 4시간 가량의 잔치가 치뤄지는 분위기이니, 우리처럼 결혼식은 보는 둥 마는 둥 돈봉투나 건네고 ‘갈비탕’ 한 그릇만 비우고 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애당초 품지 못할 밖에.

그런가하면 피로연 음식값을 치르는 과정도 재미있다. 전통적으로는 신랑측과 신부측 가운데 한쪽은 음식값을, 다른 한쪽은 음료수 비용을 댄다고 들었지만 지금은 양쪽 집안이 반씩 부담을 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예상했던 것보다 신랑신부의 친구가 많이 왔다면 초과 비용만큼은 신랑 신부가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에게 가급적이면 경제적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갸륵한 생각의 연장이라 볼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들 위주의 잔치가 아닌, 어디까지나 그 날은 자신들이 주인공임을 당당히 주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처럼 집안이나 부모 입김이 아닌 결혼 당사자들 위주로 결혼식을 준비하다보면 하객들로부터 축의금 대신 신접살림에 필요한 혼수품을 조달받는 경우가 보다 자연스럽다.

침구류나 식기류, 가전제품 등 필요한 살림 목록을 한 매장에서 일괄 작성하여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한 가지씩을 맡기는 식이다. 그래야 선물이 중복되는 일도 없고, 이중으로 구입하는 비효율성을 미리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해서 선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미리 정해지면 나머지 물품들은 대략 10% 정도의 할인가격을 적용받아 본인들이 장만을 하게 된다.

알뜰, 간결, 실속 위주의 이 나라 결혼 풍습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앞날의 축복을 빌어줄 ‘선별된 하객’들이 참석함으로 인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청첩장을 받아들고 얼굴부터 찌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신아연 호주통신원 shinayo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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