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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융합' 어떻게 해야하나

설경. 2007. 9. 27. 00:26


"기존학문 한계 넘어서려면 학과 이기주의 버려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 대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공학도, 첨단 유전공학을 파악하는 철학도는 시대의 요청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는 가시각(可視角) 30도의 일관된 자세로 한 학문을 파고 드는 방법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는 분명 한계를 안고 있다.

국내외 대학들이 미래의 키워드를 ‘학문 융합’으로 정하고 각종 연구소와 기구를 설립해 연계 전공이나 통합 과정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ㆍ시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화여대 최재천(53) 석좌교수와 서울대 정진홍(70) 명예교수가 최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정 교수의 개인 연구실에서 만나 왜 학문 융합이 필요한지, 학문간 벽을 넘어선 연구가 우리 학계에 뿌리내리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함께 고민해봤다.

환원주의에서 융합주의로

정진홍(이하 정)=지금까지 통용됐던 개념이나 인식을 추출하는 방법론이 새로운 시대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지심리학에서는 ‘뇌 세포의 어떤 부분이 상처를 입으면 종교적 감동이 사라질까’ ‘어떤 부분을 자극하면 종교적 감동이 만들어 질까’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학에서 말하는 ‘초월’이나 ‘신비’라는 개념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지요.

때문에 이제껏 이어져온 분과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 지금껏 사용했던 개념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학문과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른 학문을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학문끼리 대화하면 새로운 인식 방법이나 개념을 만들 수 있고 또 현실적 요구에 응할 수 있습니다. 종교학과 생물학, 종교학과 뇌 과학이 다른 쪽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로운 인식 지평을 만들 수 있습니다.

최재천(이하 최)=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선생이 활동 했던 시기에는 한 학자가 여러 분야를 두루 다뤘고 자연스럽게 학문 융합이 됐습니다. 이후에는 서양 중심의 환원주의의 영향으로 학문은 분과로 쪼개져 발전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인류가 지닌 지식의 총량이 크게 늘었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정약용 같은 학자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시대는 인류가 축적해 놓은 지식의 총량이 많지 않아 한 사람이 여러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 2, 3개 분야를 완벽히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또 다른 차원의 융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문 융합은 새 공용어 창출 과정

최=지난해 말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에게서 ‘우물을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여럿이 함께 넓고 깊게 파야 물이 나오는 시대입니다. 혼자 파 봐야 겉만 긁적거리다 끝납니다. 다른 학문과의 공용어를 찾는 게 학문 융합이자 통섭(統攝)이지요. 많은 학자들은 ‘내 학문만 파면 되지’ 하는데 그래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옵니다. 나와 너의 학문을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공통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개별 학문을 하는 학자들끼리 각자 사투리를 써서는 소통이 안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자존심을 ‘자존감’이라고 합니다만 철학에서는 안 쓰는 말입니다. 학문의 공용어를 만들어야 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학문적 리얼리티(진실)를 발견했다면 그 진실은 기존 학문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새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그 언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바로 학문 융합입니다.

이기적인 학문의 벽 뛰어 넘어야

최=국내 대학은 ‘학과’ 체계의 높은 벽에 막혀 있습니다. 만약 자연과학 전공 교수가 인문학 전공 학과에 새로운 연구를 해보자고 제안하면 혼만 나는 게 현실입니다. 학문 이기주의, 학과 이기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에 앞서 교수들에게 안정성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기존 틀을 완전히 뒤엎는다고 하면 학과 체계에 익숙한 교수들은 자신의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인문학, 자연과학 전공 교수들은 학과가 아닌 ‘예술과 과학’ 교수단에 속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내용으로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결정이 나면 학과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정=학문 융합을 잘못 이해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융합은 기존 학문이 잘못 됐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학문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힘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그냥 두면 자칫 경화해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종교학의 경우 옛날 같으면 초월, 신비라는 개념에 묶여 있었죠.

그러나 정치, 경제로 외연이 넓어지면서 천당 가자는 말로는 매우 모자라게 되고, 결국 과학이라는 벽과 부닥치게 됩니다. 때문에 종교, 정치, 과학을 통틀어 함께 봐야 합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사건도 종교, 정치, 과학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였죠. 정치학자의 말, 과학자의 말 등을 모두 귀담아 들으면서 문제가 서로 어떻게 만나는지 파악하고 또 사태 전체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문ㆍ자연 아우르는 기초교육 절실

최=문, 이과를 갈라 놓은 중등 교육과정도 큰 문제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가르치는 게 없어요. 중고교에서는 모든 학문의 기본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서 여러 공부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은 신입생에게 기본기 가르치기도 버겁습니다.

‘수학(修學) 장애우’ 들이 대부분이에요. 문과 출신 학생들은 이과 수업을 못 알아듣고, 이과 학생들은 문과 수업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연계전공, 협동과정 같은 학문 융합을 시킨다 한들 뭐가 되겠습니까.

정=학문 융합이 가능해야 개별 학문도 훨씬 빨리 발전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방향과 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학문 융합의 시각에서 분과 학문을 바라볼 때 융합 자체가 살아납니다.

최=어느 미래학자의 말처럼 앞으론 평생 한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고 여러 차례 전직할 수밖에 없게 될겁니다. 40대 중반에 첫 직장을 그만 둔다면 한 가지 전공만 했을 경우 큰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학문 융합입니다. 미국 유명 대학은 학생들에게 전공에 관계없이 인문학, 자연과학 등 학문의 기초를 가르치는데 큰 비중을 둡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금방 적응할 수 있는 수학 능력을 갖추도록 합니다. 만일 그런 능력이 있다면 여러 직종을 옮겨도 잘 적응할 수 있겠죠. 반면 우리 대학들은 기본조차 안된 학생들에게 그나마 편협한 교육을 하고 있어요. 대학생들은 인문학적 소양과 자연과학의 기초를 확실히 닦고 대학 문을 나서야 합니다. 잡탕 학문만 잔뜩 가르치고 배워서 사회에 나온다면 10년은 버틸지 몰라도 그 이후는 어렵다고 봅니다.

정리=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사진=조영호기자 vold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