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영화와 논술]배낭을 멘 소년

설경. 2008. 6. 26. 12:38
탈북 소년 앞엔 더 큰 '무관심'의 장벽이 있었다

평화(平和)라는 한자를 자세히 뜯어보면 '고르게 쌀(禾)이 입(口)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더불어 밥'인 셈이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마을을 평화롭게 통치하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촌장님의 대답 또한 "뭘 마이 멕여야지(뭘 많이 먹여야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먹는 문제는 인권·평화 문제와 직결돼 있다.

대홍수와 기근이 있던 1995년부터 남한으로 건너온 탈북자의 수는 이미 1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탈북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즉 '먹는' 문제였다(통계에 따르면 1995년 북한 주민 300만 명 이상이 아사). 1990년대 초반까지 한 해 10명 정도에 불과했던 탈북자 수는 1997년부터 급증했고 2008년 현재 탈북자는 1만 3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희소가치가 있던 과거에는 사회적 관심과 물적 지원이 풍부했지만 탈북자의 수가 급증하자 남한에서의 삶은 탈북 과정만큼이나 험난한 상황에 처해 있다.

영화 '크로싱'이 북한주민의 참상과 탈북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면, '배낭을 멘 소년'은 혼자 무거운 삶의 짐을 진 무연고 탈북 청소년의 남한살이를 보여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세 번째 인권 영화 '다섯 개의 시선'(2006) 중 한 편으로 정지우 감독이 연출했다. 감독은 촬영 당시 한 인터뷰에서 "탈북 청소년들은 '나이 어린 이산가족'일 뿐"이라 정의하며 소녀의 눈에 비친 남한 사회의 무관심과 편견을 보여주는 데 치밀한 공을 들였다.

소년들 틈바구니에서 담을 넘으려다 실패하고 중국 공안에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은 4:3 사이즈 앵글 안에 '2000.1.11. AM 03:01'이라는 실시간을 표시해 마치 CCTV 화면을 편집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영화의 주인공인 탈북 소녀(이진선 분)는 목숨을 걸고 벽을 넘지만, 남한 사회에 더 큰 장벽이 있음을 깨닫는다. 학교 친구들은 소녀를 에워싸고 " 북한 에서는 굶어 죽은 시체를 먹는다며? 너, 인육 먹어봤냐?"라며 낄낄댄다. 말문이 막힌 소녀는 수화를 하며 벙어리 행세를 한다. 집에 돌아와 혼자 울 때도 이불 속에 들어가 흐느낀다.

어느 날 소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퀵서비스를 하는 소년(오태경 분)을 발견한다. 숨죽이며 지내던 소녀는 오토바이 굉음 때문에 비로소 창문을 열고, 같은 처지인 소년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보호자 없는 탈북 청소년이긴 마찬가지지만 여성인 소녀에게 더 자주 부당한 일이 생긴다. 노래방에서 열심히 일을 해도 40대 남자 주인은 소녀를 함부로 대한다. 너저분한 구실을 붙여 월급까지 깎는다. 소녀는 소년에게 도움을 청해 배낭을 메고 오토바이에 오른다. 억울하게 깎인 월급만큼 1000원짜리 캔 콜라를 배낭에 담아오기 위해서다.

오토바이가 50개의 캔 콜라가 담긴 배낭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자 이들은 택시를 잡아탄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소년이 정직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기사는 택시를 멈추고 경찰서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1만8480원이라 찍힌 요금 대신 콜라 19개를 가지런히 놓고 도망친다. 마음이 편치 않은 소녀는 소년에게 필담을 전한다. "콜라를 도로 채워놓지 않으면, 우리 사장님이 북한 사람 전부 도둑놈이라고 평생 얘기하고 다닐 겁니다"라고….

그리고 소녀는 소년에게 "남조선 애들보다 오토바이 천천히 타십시오"라며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한다. 소년은 소녀에게 "내가 남한 애들보다 잘하는 게 오토바이밖에 없는데…"라고 답한다. 잠시 이어진 침묵 뒤에 "198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으로 태어난 소년은 2003년 대한민국 시민으로 사망했다"는 자막이 흐른다. 자막으로만 처리된 소년의 비극적 죽음은 홀로 남한에 내려와 의지할 곳 없이 살다 입국 후 2년이 채 안 돼 오토바이 사고로 숨진 19세 소년의 실화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주 잠깐 미소 띈 소녀의 얼굴을 보여준 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안으로 소년소녀가 질주하는 엔딩 장면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더 생각해볼 거리

①과거 귀순 용사라 불리며 영웅대접을 받던 탈북자와 90년대 후반 어렵게 국경을 넘어 남한에 정착하는 탈북자들의 인권을 비교해보자. 한편 2005년부터 통일부에서 탈북자라는 명칭을 '새터민'이라는 용어로 바꿔 부르자는 의도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②외국인 노동자에 비해 제도적 뒷받침은 나은 듯 보이지만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영화 '배낭을 멘 소년'에서 본 것처럼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국경의 남쪽' '크로싱' 같은 영화를 함께 보고 북한 주민의 참상과 탈북자의 어려움을 이야기해보자.


[윤희윤 성공회대 강사 '이 영화 함께 볼래'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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