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스크랩]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인가

설경. 2007. 9. 2. 23:58


[한겨레] 박용성교사인문사회비타민 / 난이도 수준 [고등]

■교과서 훑어보기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미(美)라는 글자는 달다[甘]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맛은 신맛, 쓴맛, 매운 맛, 짠맛과 아울러 다섯 가지 맛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넓은 의미로는 좋은[好] 것을 뜻한다. 글자의 구성으로 볼 때, 미(美)는 양(羊)이라는 글자와 대(大)라는 글자가 합한 글자인데, 양이 크면 살찌고 맛이 좋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 미(美)는 선(善)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철학>(교학사) 193쪽

예술 활동은 그것이 도덕적 반성 위에서 이루어질 때에 최고의 예술이 된다. 예술로부터 얻는 도덕적 자기 반성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도덕적인 사회로 진화하는 힘을 가진다. 투철한 도덕적 자기 반성을 기초로 한 훌륭한 예술 작품은 그 시대의 강력한 사회 도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아름다운 대상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만, 착한 행위도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미의 쾌감은 자연에서, 도덕의 쾌감은 자유의 실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와 선의 만남은 자연과 자유의 만남이요, 자연과 정신의 결합이다. ―<시민 윤리>(교육인적자원부) 128쪽

■ 교과서에서 논제 찾기

미적 경험은 남과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예컨대, 우리가 무용을 감상할 때, 어떤 사람은 전혀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지거나 황홀감을 느끼기도 하지. 또 그 무용에서 미적 경험을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율동이 전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무용가의 몸짓을 통해서 세계를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인간의 내면을 보기도 해. 이처럼 우리가 미적 경험을 통해 얻는 가치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아름다움은 대상물에 있지 않고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거야.

아름다움을 주관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예술 작품은 그것이 속해 있는 시기에 유행하는 문화적 표상이라고 하지. 듀이에 의하면, 예술은 삶의 질에 관한 판단인 동시에 삶의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수단이야. 그리고 예술은 그 예술이 산출되는 공동체의 경험을 재구성해 한 차원 높은 삶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고. 우리는 예술을 가리켜 ‘문화의 꽃’이라고 하는데, 문화가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라면, 예술의 특성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어. 따라서 예술은 지역적으로 구분해 동양의 예술과 서양의 예술로 나누는 것이 가능해. 동양 문화권에서 산출된 예술과 서양 문화권에서 산출된 예술을 비교해 보면, 예술이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

이처럼 아름다움이 개인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다르게 창조된다는 점에서 예술은 주관적이야. 하지만 사람마다 미적 경험이 다르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주관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우리의 미적 경험이 다른 까닭은 사람마다 미적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지, 아름다움 자체가 주관적이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지적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처럼 미적 능력도 교육에 의해 얼마든지 계발될 수 있잖아. 아름다움이 객관적이라는 주장은 여기에서 나와.

아름다움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 의하면, 어떤 대상물을 한 사람은 아름답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아름다움을 보는 데 실패한 거야. 다시 말해, 만일 누군가가 어떤 경치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거지. 인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 작품들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사랑받는 까닭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고 그들은 물어. 모든 아름다움에는 영원 불변의 보편적인 기준이 있다는 거야.

플라톤에 의하면,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까닭은, 이것들이 모두 어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아름다움, 곧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모방했기 때문이래.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편적 아름다움, 곧 완전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부터 이러한 완전함의 세계를 알고 있었으나, 태어남의 충격 때문에 이 완전한 이데아의 세계에 관한 기억이 억눌러졌어. 그러나 인간은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관한 경험을 통해 ‘보편적’ 아름다움을 회상할 수 있지. 예술가는 이 회상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래.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주관적일까, 객관적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펜서에 주목하게 돼. 사회학자인 그는 예술에 진화론을 적용해 예술적 감성은 어떤 특별한 단계의 사회적 적응에 대한 조건적인 영향에 따라 이뤄진다고 했어. 인간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감성을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지만, 그러나 무엇을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느냐는 시대의 사회적 영향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거야. 곧, 아름다움은 주관적이며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주장이지.

그래서인지 칸딘스키도 “모든 예술 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다.”라고 했어. 이 짧은 말에는 예술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잘 드러나 있지. 여기서 ‘그 시대의 아들’은 예술의 주관성을 나타내는 말이고, ‘우리 감정의 어머니’는 예술의 객관성을 가리키는 말이야. 이제 우리는 아름다움은 주관적이고 동시에 객관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어. 다시 말해 아름다움은 외적 대상 속에 잠재적으로 있으나(이 점에서 아름다움은 객관적이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감상되기까지는 현실화되지 않는다(이 점에서 아름다움은 주관적이다)고 할 수 있어.

박용성 여수여고 교사, <교과서와 함께 구술 논술 뛰어넘기> 저자

위 논제와 관련된 기출 문제(1996학년도 고려대 정시 논술 문제)는 인터넷한겨레(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본지에 연재되는 기출 문제에 대한 박용성 선생님의 동영상 강의는 전남교육정보원(www.jnei.or.kr/인터넷교육방송/고교논술/실전논술)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습니다.
출처 : 별먹는 빛
글쓴이 : 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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