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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유학을 위한 멘토들의 조언! 채송화·어재호의 리얼 어드바이스

설경. 2008. 9. 19. 12:42



‘지금은 겁날 게 없다. 아프리카 오지에 던져놔도 잘 살 거다.’ 관리형 유학 전문 기관 드림아이에듀의 민은자 대표는 채송화양과 어재호군을 일컬어 이렇게 말한다. 동갑내기 친구들이 한국의 입시 지옥에서 교과서만 파고들 때, 이들은 힘든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첫 번째 도전에서 성공을 거뒀다.
고2 때 과감히 선택한 미국행 그리고 6년

미국 교환학생을 거쳐 캐나다 노바 스코티아 주에서 고교과정을 마친 뒤, 음악치료로 유명한 아카디아 대학에서 음악치료를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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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 때 과감히 선택한
미국행 그리고 6년
채송화

미국 교환학생을 거쳐 캐나다 노바 스코티아 주에서 고교과정을 마친 뒤, 음악치료로 유명한 아카디아 대학에서 음악치료를 전공하고 있다.


슬렙 테스트(SLEP Test)를 통과하면 미국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도전해보라”는 아버지의 제안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꿈꿔오던 송화양의 인생을 바꾸는 서곡이었다. 미국 국무성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 학비와 홈스테이 비용이 들지 않아 집안의 부담도 줄일 수 있었다. 남은 건 본인의 의지와 노력뿐. 교환학생으로 가기에는 늦다는 고등학교 2학년, 불과 2개월의 준비를 거쳐 미국 아이오와에 도착했다. 역시나 큰 문제는 언어 장벽이었다.

“학교 친구들이 한국 사람은 뭘 먹느냐고 묻기에 ‘라이스(쌀)를 먹는다’고 했더니 다들 경악하는 거예요. 쌀은 라이스(Rice)인데, 제 발음은 머릿니를 의미하는 라이스(Lice)였던 거죠. 그게 아니라고 전자사전에 스펠링을 찍어가면서 의사소통을 시작했어요.”

돈이 많이 드는 분야라 한국에서는 포기했던 음악 공부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학교에서 무려 5개 밴드 활동을 했다. 1년의 미국 생활 뒤, 캐나다로 옮겨 고교를 마쳤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기에 연주 분야보다는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음악치료 공부를 위해 아카디아 대학으로 택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기 중 쓸 용돈을 벌어온 기특한 송화양은 이제 1년여 남은 대학 생활을 마치면 음악교사 자격증을 갖춘 음악치료사가 될 계획이다. 기회가 된다면 음악치료 분야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가장 어려웠던 점 _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한창 예민할 때라 감정 기복이 심했는데, 내 얘기를 털어놓을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게 힘들었다. 방학이면 가족과 거의 24시간을 붙어 지냈다. 만약 유학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부모님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유학을 계획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_ 어른 공경 잘하고 예의바른 아이들은 여기서도 인기가 많다. 혼자 유학 온 아이들은 간혹 홈스테이 호스트와 갈등으로 상처를 많이 받는다. 시간 관리부터 돈 관리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도 어렵지만, “많이 먹지 마라”는 호스트의 얘기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어 고학년이 될수록 고립되거나 우울한 성격으로 변하는 경우도 봤다. 자기 관리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교환 학생, 언제 떠나면 좋을까 _ 중학교 3학년 정도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나이다. 한국에서 받은 교육이 어느 정도 바탕이 되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수능시험에 너무 임박하지 않은 시기라는 점도 권할 만한 이유다.

미국 학생들의 생활은 어떤가 _ ‘O.C’나 ‘가십걸’과 같은 드라마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교환학생은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시골에 주로 가는데, 그곳 아이들은 다들 평범하고 소박하다. 교과서가 두껍다보니 등산가방을 메거나, 바퀴 달린 가방을 들고 다닐 정도로 패션에는 무신경하다. 물론 치어리더와 쿼터백의 세계가 존재하지만, 동양 아이들에게는 먼 얘기다.

학습량은 얼마나 되나 _ 고등학교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숙제는 예습·복습 위주인데 두세 시간이면 할 수 있는 분량이다. 단, 한국 학생들은 영어를 따라잡기 위해 일반 학생들보다 서너 배 더 공부해야 한다.

홈스테이 호스트는 믿을 만한가 _ 미국은 국무성에서 주관해 홈스테이 호스트 선정이 까다롭다. 안정된 기반을 갖추고 다른 나라에 관심이 있으며 지역 평판이 좋은 사람들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딸을 둔 엄마는 걱정하게 마련인데 _ 그런 부분은 전혀 없었다. 홈스테이 호스트를 “엄마 아빠”라고 불렀는데 그중 아빠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다. 등굣길에 항상 문 앞에서 “Boy is?”라고 묻고는, 내가 “Bad”라고 답하게 하셨다. “남자는 아빠 빼고 다 나쁜 사람이니까 잘 행동하라”고 늘 말씀하셨다. 치마 길이가 짧으면 갈아입으라고도 했다. 모범생과 어울리거나 평범한 옷차림을 하면 ‘노는’ 아이들이 아예 접근하지 않는다. 한국보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들도 많다.

Life is Challenge!

꿈이 없던 소년, 캐나다에서
희망을 찾았다

어재호
영동고 재학 중 캐나다 서존 맥도널드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불과 2년 반 만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캐나다 토론토대 경영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쾌거를 이뤘다.

처음 재호군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드림아이에듀를 찾았다. 다른 직원들은 그의 유학을 반대했다. “저런 학생을 보내면, 우리가 힘들어진다”고도 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재호군의 유학을 추진한 민은자 대표는 부모의 사랑 하나만큼은 확실히 받은 아이라는 점을 믿었다고 했다.

재호군은 스스로 학교생활 부적응자였다고 말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는 브라질 축구 유학 추천을 받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학업 성적이 좋은 아들이 축구하는 것을 극구 막았다. 축구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재호군은 그때부터 ‘공부를 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오토바이를 타고, 온갖 나쁜 행동은 다 했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유학길에 올랐어요. 그동안 해온 행동으로 인해 부모님께 죄송하기도 했고, 어려서 외국에 살던 경험이 있어서 캐나다에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보통 학기가 시작하는 9월을 대비해 유학길에 오르게 마련인데, 재호군은 3월에 덩그러니 낯선 학교에 떨어졌다. 하루빨리 한국을 떠나게 하기 위해 민 대표가 내린 특단의 대책이었다. 학교에 동양인이라고는 재호군이 유일했다.
“아이들 시선을 피하느라 화장실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어요. 3일째 되는 날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어차피 내게 주어진 환경,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고 마음먹었죠. 유학생이니까 들을 만한 수준이 아닌, 정말 제대로 된 영어를 하고 싶었어요.”

재호군의 축구 실력이 이때 빛을 발했다. 주위에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학교 대표 선수가 됐다. 재호군 덕분에 소속 학교가 1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지역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고3 때는 축구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로 전학도 갔다.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재호군은 학교 유일의 동양인으로 저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새벽 3, 4시까지 공부한 결과 토론토대를 비롯한 총 8개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영어 공부는 어떻게 했나 _ ‘Hi’라고 하면 될 걸 아이들은 ‘What's up’이라고 한다. 처음엔 도무지 못 알아들겠더라. 그때그때 노트에 적어 와서 홈스테이 아줌마한테 물어보고 연습하고는 다음날 만나면 내가 먼저 써먹었다. 그런 식으로 반복하다 보니 영어가 늘더라.

친구는 어떻게 사귀었나 _ 어려서 잠시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과테말라에 살면서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워서인지 영어가 빨리 늘었다. 그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하우스파티에 가기도 하고, 그들만이 쓰는 언어를 익혔다. 학교에서는 축구부, 육상부, 배드민턴부, 배구부 등 안 해본 게 없고 교내 패션쇼 무대에도 섰다.

위기는 없었나 _ 전학가면서 홈스테이를 옮겼는데, 그때 온갖 고생을 다했다. 전기장판도 못 쓰게 하고, 전기밥통의 코드는 아예 빼버리고, 냄새난다며 라면도 못 먹게 했다. 심지어 냄새 때문에 땅에 묻어둔 김치까지 파서 버릴 정도였다. 방과 후 활동을 하고 귀가하면 집에 먹을 게 없어서 굶기 일쑤였다. 자식이 없는 30대 초반 호스트라 배려심이 부족했다. 다른 집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바꿔도 별 차이 없을 것 같았고, 또 이 경험이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 어렵지 않았나 _ 일단 수학이 한국보다 쉬워서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회복하니 뭐든 할 수 있었다. 방과 후에는 무조건 남아서 선생님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대부분의 선생님이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대학 입학 서류 준비할 때는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았다. 내가 최초였다.

자신과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_ 학창 시절 겪은 방황이 창피하지 않다. 그것도 일련의 사회생활이었다. 그로 인해 캐나다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럭비부 아이들과 다툼이 생겨도 진 적이 없다. 강단으로 버틴 거 같다.

글 / 장회정 기자 사진 / 이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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