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문학숲 논술꽃]제도의 두 얼굴

설경. 2008. 10. 21. 17:06

[동아일보]

○ 우리 사회에 공정성이나 정의의 원칙이 없다면?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였던 몽테스키외는 ‘트로글로다이트’라는 가상의 부족의 삶을 통해 법과 질서가 없는 사회의 문제점을 그려냈다. 트로글로다이트 부족은 자신들을 엄하게 다스리는 왕과 행정관을 죽이고 ‘어느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으며, 자신의 이해만을 돌볼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기로 합의’하고는 이기적인 삶을 추구한다.

『옛날 아라비아에 트로글로다이트라고 하는 작은 부족이 있었다.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 부족은 인간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웠던 이전 시대 트로글로다이트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는 이 부족은 그들의 선조들처럼 그렇게 이상하게 생기지도 않았고 곰처럼 털이 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끽끽거리지도 않았으며 눈도 둘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사악하고 잔인하여 자기들 사이에 어떤 공정성이나 정의의 원칙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외국 태생의 왕이 있었다. 왕은 부족의 타고난 사악함을 고치기 위하여 사람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음모를 꾸며서 왕을 죽이고 왕족들까지도 모두 없애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통치 기구를 만들기 위해 모임을 가졌고, 많은 의견 다툼을 한 뒤에 행정관들을 뽑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행정관들을 부담스러워 하여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뽑힌 행정관들마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새로운 통제로부터 벗어나자 이 부족 국가는 타고난 사악함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각기 어느 누구의 말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이해만을 돌볼 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만장일치의 결정은 부족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죽도록 일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제 나는 나만을 생각할 것이다. 나만 행복하면 되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해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통제로부터 벗어난 부족은 어떤 공정성이나 정의의 원칙도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됐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필요를 채웠다. 이들의 삶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와 같았다.

○ 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악한 트로글로다이트 부족의 삶을 통해 법과 질서가 없이 모두 이기적으로 사는 삶이 자신은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때는 바야흐로 곡식을 수확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마른 산악지대의 경작지가 있는가 하면, 수로(水路)가 잘 갖추어진 낮은 경작지도 있었다. 그해는 몹시 가물어서 높은 지대의 농사는 완전히 실패한 반면 물 공급이 잘된 낮은 땅은 큰 풍년이 들었다. 많은 수확을 거둔 사람들이 추수한 곡식을 나누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많은 산악지대 거주자들이 굶어 죽었다. 다음 해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높은 지대의 땅은 이례적으로 비옥해졌고 낮은 지역은 홍수가 났다. 또다시 인구의 반이 굶주림으로 아우성쳤지만 작년에 홀대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굶주린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중략)

비옥한 땅을 갖고 부지런히 경작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두 이웃이 결탁을 해서 그를 집에서 내쫓고 땅을 가로챘다. 두 사람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또 다른 강탈자를 막기 위해 상호 연맹 관계를 맺었고, 여러 달 동안 실제로 서로를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것을 나누기가 아까웠던 동업자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이고는 땅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그의 소유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또 다른 두 사람이 와서 공격을 했고, 혼자서 두 사람을 방어하기에는 힘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트로글로다이트 부족은 개인의 이익만 생각할 수 있게 됐지만, 그것이 자신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항상 농사가 풍년일지, 흉년일지를 걱정해야 하고, 폭력을 통해 얻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며, 폭력에 의해 또다시 재산을 빼앗기는 등 악순환이 되풀이됐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태도는 영원히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이르게 하는 근시안적인 방법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 제도는 만능인가

그러나 제도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제재 역시 만능은 아니다. 제도는 분명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제도를 통해 우리는 삶의 안정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제도로부터 비롯된 타율적이고 위협적인 권력 앞에서 무기력한 개인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제도는 인간의 생식과 보호, 생계유지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형식이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규칙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 안정된 권력이 된다. 제도는 본래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들이 서로 견뎌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찾아낸 형식이다. 제도 안에서 삶의 목적이 공동으로 추구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되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으며 내적 삶의 안정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제도는 우리가 항상 격렬하게 대립해야 하는 부담과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결정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아르놀트 겔렌, ‘인간학적 연구’]』

○ 인간을 위한 제도

우리는 아래 제시문에 나온 아도르노의 말처럼 제도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만약 제도가 인간 사회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인간은 제도에 의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도르노: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을 지배하는 제도로부터 비롯된 이 권력은 철학의 용어로 ‘타율적’이라고 불립니다. 제도는 인간과 맞닥뜨려 있는 낯설고 위협적인 권력입니다. 당신은 불안정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그와 같은 불행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여 제도의 권력을 용납하게 된 것은 비판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도가 변경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에게 엄청난 중압이 되어 개인을 말살하는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마침내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것이 되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중략)

아도르노: 그건 나도 인정합니다. 내 견해는 다만 그로부터 얻은 성과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늘날 기계 장치의 한 부속품이지 자신을 지배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쓸모없는 부속품이 되지 않도록 세계가 이루어지고, 인간을 위해서 제도가 존재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를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도가 인간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는 별로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프리드리히 그렌츠, ‘아도르노의 철학’]』

제도의 사전적 의미는 ‘사회의 성원(成員) 사이에서 여러 가지 생활영역을 중심으로 한 규범(規範)이나 가치체계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복합적인 사회 규범’이다. 단적으로 제도란 규범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규범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제도는 제도를 위한 제도가 되어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김은정 ㈜엘림에듀 집필위원 ‘논술독파’ 시리즈 인문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