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사설,칼럼)

[김형태칼럼] 덜 쓰고 더 불편하게

설경. 2008. 11. 19. 21:03

[한겨레] 김형태칼럼

11월의 뜨락은 적막하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 아래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여름 내내 마당 한구석 돌절구에 고인 물을 찾아 날아왔는데 이제는 얼어붙어 목을 축일 수가 없다. “도(道)는 만물에 충만하지만 사람처럼 걱정하지 않는다.”(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주역에는 그리 써 있던데, 나는 저 새가 물 못 마시면 죽을까 걱정된다.

지난봄 바로 저 자리에서 동네를 떠도는 고양이가 물 마시러 온 새를 덮쳤다. 순식간에 깃털 몇 조각만 남긴 고양이가 미워 신발짝을 집어 던졌더랬다. 저 새는 바닷속 단세포에서 시작되어 수억년을 이어져 내려온 삶의 연결고리를 우리집 마당에서 끝냈다. 이것도 도가 만물을 두드리는 것일까.

엊그제 친구가 전화를 했다. “어디 일자리 하나 없을까. 백만원도 좋으니 자리 좀 알아봐 다오.” 중학교 때 전교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던 친구다. 얼음 돌절구에 앉아 있는 새 같다.

작년 이맘때가 꿈만 같다. 봉투 붙이고 구슬 꿰는 산동네 칠십 노인도 주식을 사고 회사에 갓 들어간 내 딸도 중국 펀드를 샀다. 이명박 후보가 허름한 식당에서 무럭무럭 김 나는 순댓국을 먹는 광고를 보면서 가난뱅이들도 꿈에 부풀었다. 저 사람이 내 돈을 잔뜩 부풀려 주리라. 뉴타운이 되면 이 추레한 연립에서 번쩍이는 아파트로 이사갈 수 있으리라. 그 덕에 김근태며 노회찬이며 가난뱅이 편들겠다고 나선 이들이 모조리 선거에서 떨어졌다.

1년이 채 안 된 지금 뉴타운이며 펀드는 끝을 모르게 추락 중이다. 한 인터넷 논객은 조만간 주가지수 500에 부동산은 반값이 될 거라고 예언했다. 온 국민이 부자의 꿈에 집단최면이 걸렸던 걸까. 돈을 좇은 지난 두 번의 선거는 당분간 우리의 삶을 팍팍하게 할 게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게 풀이라지만 풀뿌리 서민들이야 돈 버는 데서는 맨 마지막이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제일 먼저 쓰러진다. 올 한 해 동안 문을 닫은 음식점이 4만개. 문을 연 가게들도 인건비도 못 건지는 곳이 열에 일곱이란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아마 지난 선거에서 부자의 꿈을 따라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에 투표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파국 앞에서 모두 어찌 돈의 뜀박질을 규제하고 공공의 이익을 도모할 건가를 고민하지만 유독 우리 정부와 여당만은 눈 하나 꿈쩍 않고 부자들 세금 줄이는 데 급급하다. 종부세 2조원이면 월급 백만원짜리 일자리를 무려 200만개나 만들 수 있는데도 그냥 폐지다. 11월의 뜨락같이 삭막한 이 시절에 가게 문 닫고 일자리 잃으면서 선거는 치열한 계급투쟁이라는 걸 가난뱅이들이 분명히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희망 하나 더. 주가 500, 부동산 반값의 예언이 실현되면 부자고 없는 이고 덜 쓰고 더 불편하게 사는 걸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게다. 한 사람이 고기 안 먹으면 다섯명이 곡식을 먹을 수 있으니 시절이 어려워져 고기 덜 먹으면 먹을 것 없어 해적이 된 소말리아 사람들도 같이 먹고 살 수 있겠다. 승용차 혼자 몰고 다니다 여럿이 함께 버스 타면 북극의 빙하도 덜 녹을 테니 주가 500의 시대가 그저 나쁜 일만도 아니다.

음양의 기운이 바뀌는 동짓날 밤 12시에는 천심도 움직이지 않는단다. 지금이 그때이면 좋겠다. 온 나라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펀드며 부동산으로 부자 되길 기다리는 자본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덜 쓰고 더 불편한, 그러나 모든 이들이 엇비슷하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가 열리는 동짓날 밤 12시면 좋겠다.

김형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