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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최진실은 이제 고유명사가 아니다 / 오한숙희

설경. 2008. 11. 21. 21:01

[한겨레] 시론

사흘 전에 최진실씨의 49재가 있었다. 망자가 이승을 완전히 떠난다는 날이 이 날이다. 이제 진실씨는 떠나갔을까. 떠나지 못했을 것 같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어린 내 새끼들, 너희들을 놓고 온 것도 애통한데 이 어미가 벌어놓은 돈을 쓰지도 못하고 앞날이 어찌 될지 불안에 떨고 있다니. 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늙은 어머니, 자식 앞세우는 고통을 드린 것도 큰 죄인데 딸을 버린 사위에게 또다시 큰 수모를 겪게 하다니. 내 일찍이 친권포기 각서에 공증까지 해놓고 성까지 바꿔놓았거늘 이리 될 줄 내 몰랐다.”

억울하고 원통해서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최진실씨의 사망 후,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그것이 법에 따라 가능한 일이라고 할 때 그 법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유명 연예인 집안의 재산 싸움이라는 인상이 부각되면서 친권법의 부실함이 가려져 왔다.

이건 최진실씨 전남편 개인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법이 미비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따라서 초점은 친권법에 맞춰져야 한다.

다음 카페 한부모 진실방에는 연일 친권 제도의 허점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글이 올라온다. 자녀의 여권을 만들어야 하는데 10년 넘게 연락두절인 친권자를 못 찾아 기회를 놓친 사연, 아이 명의로 보통예금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는 현실, 좋은 입양 부모를 코앞에 두고도 친권 때문에 안타까운 보호시설 아가들 …. 허술한 친권법의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 이번에 최진실이라는 유명인을 계기로 하나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친권은 미성년 자녀들을 대리하여 법적 권한 행사를 하는 것으로, 그 입법 취지는 어디까지나 어리고 약한 자녀들을 위하고 보호하려는 것이다. 자녀들의 안정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 친권 행사는 권력 남용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국가는 친권에 관한 법을 만들면서 친권이 본래 기능에서 빗나가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해야 했다. 생물학적 친권이 기계적으로 부활하도록 내버려둘 게 아니라 독일처럼 사전 자격심사가 선행되어 아이들의 복리가 보장되도록 배려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국가는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친권 문제를 다루면서 어른들 이야기만 하고 어른들의 권리만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서 아이들이 멍들고 있다. 논쟁을 할 때가 아니다. 최진실을 편들고 그의 전남편을 가로막자는 게 아니다. 졸지에 엄마를 잃은 어린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주는 것이 최선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어른의, 사회의, 국가의 도리라는 것이다. 천륜을 끊자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천륜을 실현할 법적 장치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점을 환기시키고자 ‘한부모 자녀를 걱정하는 진실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라고 남녀 대립 구도로 몰아가려는 시도는 위험을 넘어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한부모 자녀 중에는 딸만 있고 아들은 없는가. 어머니 한부모 가정이 더 많긴 하지만 아버지 한부모 가정도 적지 않다. 한부모가 된 여성에게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가 있기 마련이고, 한부모 남성에게는 어머니와 여자 형제가 있다. 한부모 가정이 고통을 받으면 그들의 부모 형제도 괴로움을 나눠 안는다. 남녀를 포함하는 가족의 문제를 남녀로 분리시켜 갈등으로 몰아가려는 시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로 말미암은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최진실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땅에 수많은 남녀 최진실과 그 자녀가 있다. 친권법이 완전해져서 최진실씨도 홀가분하게 떠나갈 수 있길 바란다.

오한숙희/여성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