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자료

[역사가 꿈틀 논술이 술술] 자식까지 죽인 영조 '탕평' 완성은 못해

설경. 2009. 5. 3. 23:13

조선의 사대부들은 다양한 정치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타협함으로써 왕도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른바 '붕당(朋黨)론'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오늘날의 다당제(多黨制) 정당정치와 견줄만하다. 하지만 붕당정치는 신권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지는 현상을 낳았다. 그래서 조선의 왕들은 붕당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중에서도 영조와 정조가 극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난 서얼로, 노론의 힘을 업고 즉위한 영조. 그는 태생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완벽주의자가 됐다. 그리고 소모적인 권력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탕평(蕩平)'을 추구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신하들을 쓸어서 편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영조의 그러한 강박관념은 결국 자신의 아들을 뒤주 안에 가두어 죽이는 끔찍한 사건을 빚어냈다. 물론 당시 세자는 궁궐에서 칼을 함부로 휘둘러 궁녀를 죽이는가 하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여색을 즐기는 등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사도세자에 반대하는 노론 측 음모로, 세자의 비행(非行)이 과장되어 백일하에 드러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자식을 죽일 부모가 어디 있을까.

문제는 영조의 내면에 있었다. 붕당을 쓸어버리고 자손대대로 강력한 왕권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영조는, 이미 싹수가 시들어버린 세자를 탕평의 걸림돌로 여겼다. 그대로 두자니 나중에 왕권이 붕당에 휘둘릴 게 뻔했고, 세자의 직을 거두어들인다면 노론에 굴복하는 꼴이 됐다. 세자를 사이에 두고 당시 다수파였던 노론 강경파와 소론·남인 등 소수파가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견딜 수가 없던 영조는 절대군왕으로서 자신의 단호함을 보여주며 붕당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해바친 자를 참형에 처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이처럼 자식을 죽이는 참극을 빚으면서까지 영조는 강력한 왕권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열한 살의 세손을 강력한 탕평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후계자로 길러낸다. 다행히도 세손은, 영조가 추구하는 완벽한 군주의 자질을 보이며 잘 자라줬다.

영조는 손자 정조에게 늘 말했다. 자고로 붕당이라는 것은 사리사욕을 위해서 못할 것이 없는 무리라고. 입으로는 신하가 임금을 넘어설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은 임금을 올라타는 게 그들이라고 역설했다. 죽은 사도세자의 일도 붕당을 누르고 탕평을 펼치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했다. 또 자신은 탕평을 제대로 펴지 못했으니 세손이 그 일을 이뤄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13년째 되던 영조 51년. 병색이 짙은 영조는 신하들을 대전에 모아놓고,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공표했다. 하지만 홍인한과 정후겸, 김귀주 등 노론 측은 기겁을 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영조는 강경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소, 소론을 알겠소? 또 조정의 일을 알겠소?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어찌 알고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또 어찌 알겠소? 지금 형편이 그러하니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고 싶을 따름이오."

이에 정조의 외삼촌 되는 홍인한이 대꾸하고 나선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판이나 병판을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정의 일도 알 필요가 없사옵니다."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다. 곧 등극하게 될 세손이 나랏일과 조정 일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는, 발칙하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이에 영조는 격분하면서 대리청정을 강행하면서 세손에게 군권을 쥐여준다. 더불어 충성스러운 신하 채제공에게 세손의 안위를 당부하고 숨을 거둔다. 그 뒤를 이어 세손이 즉위하였다. 그가 진짜 탕평론자 정조다.

영조는 일찍이 노론과 소론 간의 격심한 당쟁 속에서 등극한 터였다. 그래서 즉위 후 곧바로 탕평책을 펼치며 각 당의 온건론자를 고루 기용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이 반발하는 바람에 또 다른 당쟁이 빚어졌다.

게다가 혼인관계로 맺어진 척신들이 탕평에 참여하면서, 그들이 또 다른 붕당이 되는 모순을 드러냈다. 결국 영조의 '완론(緩論) 탕평'은 색깔이 흐릿한 온건파만 등용함으로써 노론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나중에 정조는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조금 더 준엄한 '준론(峻論) 탕평'을 추구하게 된다.

[박남일 자유기고가 · '청소년을 위한 혁명의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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