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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논제 해결하기 [난이도 = 고등]
<논제> (가), (나), (다), (라)를 참고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지식인상에 대해 논하시오. (800±50자)
(가) 예를 들어 프랑스의 많은 사이비 지식인들이(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혹은 알제리 독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사실 도를 지나친 감이 있다. 우리의 해외 영토에는 너무 여러 가지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어느 편의 것이건 폭력에는 반대다. 나는 백정이 되기도, 백정의 희생물이 되기도 둘 다 원치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식민자에 대한 원주민들의 반항에 반대한다.”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사이비 보편주의자의 입장이란 결국 다음과 같은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피식민자들에 대한 식민자들의 만성적 폭력(테러에 의해 지탱되는 끔찍한 착취, 실업, 영양실조)에는 찬성이다. 아무리 어떻더라도 그것은 결국에는 사라질 사소한 악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피식민자들이 자기들을 억압하는 식민자들에 대항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데는 반대다.” 그러므로 근본적 사고를 하는 진정한 지식인은, 사람들이 억압자의 폭력에 대한 피억압자의 역폭력을 거부하는 이상, 억압자들을 향해 완곡한 비난이나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봉급 수준을 균등하게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뭔가 개선책을 시행해라, 또 제발 보다 더 많은 정의를 이룩해 보라는 투로) 무의미한 일임을 확인하게 된다. (중략)
지식인은 “근원적인 목적을 수호하는 자”가 되는데 이 근원적인 목적이란 인간의 해방, 인간의 보편화, 곧 인간의 인간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즉 실용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상부 구조의 말단 관리로서 사회 내에서 일정한 힘을 행사하는 반면 이들 전문가 속에서 생겨난 지식인은 비록 그가 정당 지도부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어떤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는 그에게 또 다른 수준에서 상부 구조의 말단 관리적인 성격을 부여하는데, 그는 원칙상 이것을 받아들이면서도 또한 끊임없이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며, 선택된 수단과 추구되는 목적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일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그는 증인을 넘어서는 순교자까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권력은 그것이 어떤 성격의 것이든 지식인들을 자기 선전에 이용하려 들면서도 지식인들에 대해 불신하며, 항상 그들 자신에 의해 그들을 숙청하려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한, 지식인은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를 거부하고 민중조직의 기회주의를 반대하면서 그것들로부터 민중을 지키는 민중 계급의 옹호자로 남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중 발췌.
(나)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확고한 집념)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엄숙한 차림새)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와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배신하는 변절자를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의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깨우침의 각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識見)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지사(志士)와 정치가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할 때의 혁명가와 정치인은 모두다 지사였고 또 지사라야 했지만, 정당운동의 단계에 들어간 오늘의 정치가에게 선비의 삼엄한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 줄은 안다.
-조지훈, <지조론> 중 발췌
(다) 한말로 ‘선비’는 이조의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 즉 양반들의 도의적 규범이라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선비’는 원한다고 아무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상이 아니었다. 선비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양반이라는 신분에 국한되었으며, 상민(常民)은 아무리 인격과 학식을 겸비해도 선비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선비는 철저하게 비민중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훌륭한 선비는 민중 앞에 초연해야 했으며 민중이란 ‘따르게 하고 알려서는 안 될 중우(衆愚)’에 지나지 않았다. 선비는 또 철저하게 비세속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손에 돈을 쥐는 법이 없고 쌀을 물어보는 법이 없다’는 것이 선비 생활의 이상이라고 했다. 세속적인 문제는 일체 알려고도 않고 알지도 못하며 오로지 대의(大義)를 논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고 했다. 선비의 생활은 한 말로 관념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18세기 말엽 이 땅을 찾아온 유럽의 선교사와 여행자들이 코리아의 양반 생활이 너무나 가난하면서도 빈궁 속에 태연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례가 많았다.
이런 형이 선비의 이상이라면 오늘의 우리에게 선비형 인간이 바람직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한데 이처럼 전시대적 인간상인 선비가 오늘날 왜 새삼스럽게, 심지어 예찬까지 받게 되었는가. 4·19를 계기로 한때 구세대가 지탄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구세대는 썩었다’, ‘나라를 못쓰게 망쳐 놓았다’해서 마치 부정부패의 상징처럼 공격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다. 사실 구세대는 이런 공격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8·15 이후의 정치 경제 생활이 줄곧 상궤(常軌)를 벗어나 혼란을 거듭한 것을 볼 때 비난의 적(的)이 된 것도 무리라고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어떤가. 오히려 그 전시대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들린다. 일신의 출세와 안락을 찾아 변절을 해도 전처럼 수치는 고사하고 오히려 선망하는 풍조조차 생겼고, 부정부패의 형태도 더욱 지능화되어, 도대체 도의적 처신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렵게 됐다는 평이다. ‘부조리 일소’란 구호 아래 당국의 정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하나 이른바 ‘윤리 도덕’의 타락은 상(上)은 물론 사회 저변에까지 만연돼 일소는 용이하지 않다는 말이 들린다. 국민 전체가 도의 의식이 타락됐다는 개탄의 소리가 들린다.
‘선비’의 예찬, 선비형 인간의 대망론(待望論)이 대두하게 된 것도 아마 이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선비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전시대적 성격이 짙기는 했으나 한편 오늘의 시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미점이 없지도 않다. 비민중적이며 세속에 어둡고 공리공론(公理空論)을 일삼는 관념적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그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를 대의를 위해 발휘하기도 했다. 직언(直言)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사 목이 달아나는 것이 뻔한 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히 간언(諫言)을 서슴지 않기도 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관군(官軍)이 무색하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우는 등 충의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선 서거정(徐居正)의 말대로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를 보이기도 했다. ‘사색당쟁(四色黨爭)’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옛 선비에 변절이란 도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손자대까지 그들은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다. 매천(梅泉)같이 초야(草野)의 일개 무명 선비조차 망국(亡國)을 보다 못해 순국(殉國)을 했다. 선비로서 의병 대장 또는 순국열사로 길이 청사에 빛날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의 그 굳은 지조, 순국의 애국 사상, 안빈도락(安貧道樂)하는 생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긍정적 면에서 선비의 좋은 점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은 것이 없다. ‘일본의 무사도, 유럽의 기사도’는 근대에까지 무엇인가 전통을 남겼고 현대 사회에 긍정적으로 일부 계승된 족적이 남아 있으나, 우리에게는 '선비'의 전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송건호, ‘선비정신’ 중 발췌
(라) “서구 지식인들의 책무는 ‘서방세계의 수치스런 짓’에 대한 진실을 서방세계 대중에게 알려서, 대중이 범죄 행위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서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 없는 정의다. 지식인들이 크메르 루즈의 잔혹 행위를 고발하기는 했다. 그들이 진실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가상하다. 하지만 그 잔혹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제안은 없었다. 누구도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고발의 가치와 중요성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는 칭기즈 칸이라도 고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발은 도덕적 차원에서 큰 가치를 갖지 못한다. 게다가 실제의 행동은 거의 언제나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지식인의 진짜 얼굴을 밝혀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번에는 ‘대중’이란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자.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려면 올바로 선택된 대중에서 진실을 알려야 한다.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이유는 교화(敎化)의 목적도 있지만 일차적인 목표는 인간적 의미를 갖는 행동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줄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권력자들에게 진실을 말한다고 특별히 명예로울 것도 없다. 그들을 상대할 바에는 실질적인 역할을 해 줄 대중을 찾는 것이 낫다. 게다가 그런 대중은 단순한 대중이 아니라, 사람들이 건설적인 정신으로 참여하고 싶어하는 공동의 관심사를 지닌 공동체다.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나눠야 한다. 이런 자세는 좋은 교사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제2의 천성이며, 지식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기도 하다.
-노암 촘스키, ‘지식인의 책무’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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